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지워진 기억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889회 작성일 23-06-23 14:22

본문

이모는 듣기 버튼이 눌린 오디오북처럼 쉬지 않고 말을 했다.  

심중에 저장해둔 이야기가 많았던 걸까? 아마도 그 책에는 쉼표가 없는 듯했다. 대상이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누군가 보이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경계하기도 하고 아이처럼 웃기도 하고 마음대로 호칭을 붙어 상대를 부르기도 했다. 그 덕에 사촌 언니는 졸지에 이모의 언니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도 닮긴 했는데, 이모 눈에는 큰이모와 많이 닮아 보이는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건 치매를 앓는 이모가 자신의 언니를 기억했다는 거였다. 기억의 회로 속에 누가 지워지고 누가 남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를 잊은 건 분명했다. 

조카 중에서도 나를 어여삐 여겨 대학 등록금을 대주고 친정엄마보다 잔소리를 더 많이 하며 내가 잘되기를 응원하고 바랐던 이모였는데, 이름도 잊었다. 목소리와 억양도 예전 그대로이고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거시기’라는 추임새를 넣는 걸 보면 분명 우리 이모가 맞는데, 묻는 말에는 반응이 없고 이상한 말만 하니 다른 사람 같았다. 정신이 아픈 이모가 못내 안쓰러웠다. 

성한 사람 모시는 것도 힘든데 그런 이모를 요양병원에 보내지 않고 돌보는 조카 또한 안쓰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매에 걸리면 본인만 행복하고 주위사람은 힘들다더니 정말 그랬다. 

친척들은 어쩌다 한번 다녀가면 그만이지만, 함께 사는 조카의 고통은 줄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차라리 몸이 아픈 게 낫지 정신 줄을 놓는 건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매는 총명하고 열정적이던 이모의 삶을 여러모로 바꿔 놓았다. 그나마 착한 치매가 와서 입에 달고 살던 욕은 완전히 잊어버렸고, 원망과 화도 가라앉았다. 가끔 고집을 부리기도 하지만 토닥이면 금방 꼬리를 내렸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지만, 이모는 하나뿐인 가지에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자식이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니 이모의 근심 지수는 몇 배로 높아졌다. 생기지 않은 일까지 끌어다 걱정하는 편이어서 자신을 볶기도 했다. 그랬던 삶이 버거웠는지 이모는 치매라는 옷을 갈아입은 후 근심 보따리를 다 내려놓은 듯했다. 

무덤에나 들어가야 잊힐 근심들이 절로 사라진 것이다. 좋은 기억만 남겼는지 표정도 밝아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직은 배변도 스스로 해결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십여 년 전 시작된 치매는 서서히 이모의 기억을 지우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벽에 걸린 남편 사진을 보며 저분은 누구시냐고 묻기에 이르렀다. 

이모는 평생을 함께 살았던 이모부와 아들을 지우고, 유년의 어느 날로 돌아간 듯 보였다. 기억 언저리 어디선가 친정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기도 하고, 뒷마당에 칼과 바구니를 들고 나가 쑥을 캐는 등 몸이 기억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왜 캐는지를 잊었다는 거다.  놀러가면 쑥개떡을 잔뜩 만들어서 여행 가방 하나 가득 싸주곤 했던 이모가 쑥의 사용처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너무 슬펐다. 

여전히 쑥을 따고 거실에 늘어놓는 게 귀찮아서 화를 낼 법도 한데, 조카는 정글이 되어가는 뒤뜰을 밀어 버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할머니 놀이터라고. 

이모는 공군 조종사였던 이모부를 만나 위스컨신주에 뿌리를 내렸다. 한국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에 미국으로 시집와 언어와 문화 차이로 힘들게 살았다. 이모부가 돌아가셨을 때 아마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하나 믿고 태평양을 건넜으니 말이다.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에 모든 고통과 책임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세월이 흘러 살만해지니 이모가 의지했던 사람들이 돌아가시기 시작했다. 

동양에서 온 동서에게 살갑게 영어를 가르쳐 주며 의지가 되어주었던 형님, 친구, 남편, 교우들. 거기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2020년 4월에 코로나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로 발이 묶여 오빠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다. 이모가 치매에 걸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었다. 외아들의 죽음을 알았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모는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모른 채 아흔 다섯 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다.

올여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딸과 LA에 사는 조카가 동행해주었다. 생기지 않은 일을 끌어다 걱정하는 병이 전염되었는지 이러다 이모가 돌아가시면 자주 찾아 뵙지 못한 게 얼마나 후회될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비행기표를 끊었다. 

1시간 40분이면 가는 그 길이 왜 그리도 멀었던 걸까. 이모가 평생을 살아온 밀워키에서 이모를 만났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이모가 쉬지 않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밥을 먹은 게 전부였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루 앞도 알 수 없는 날들을 흘러간다. 남은 날들이 이모에게 행복이었으면 좋겠다. 

건강한 모습으로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그곳을 떠나왔다. 오늘이라도 기억이 돌아와서 전화를 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이모의 잔소리가 못내 그립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지난밤 늦게 달라스(Dallas)에서 6시간 운전을 하여 텍사스의 끝에 위치한 도시인 인구 20만의 카우보이 도시 아마릴로(Amarillo)에 도착하여 여장을 늦게 풀었기 때문에 팔로 듀로 캐년 주립공원(Palo Duro Canyon State Park)으로 가기로 한…
    문화 2023-06-30 
    최근 한국 통계청에서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대학생 졸업자 10명 중 7명은 평균 1천625만원의 빚을 지고 졸업한다고 한다.  터무니없이 높은 대학 등록금 때문에 휴학하는 학생들도 늘어나고 방학 동안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보태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뭐니 …
    세무회계 2023-06-30 
    자동차 보험료가 운전규정 위반 티켓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이미 상식수준이 되었다. 규정 위반 티켓을 받으면 벌금을 내야하는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3-5년간 티켓받은 기록으로 인해 보다 많은 보험료를 지불해야 한다.  사실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규정위반 티켓은 …
    보험 2023-06-30 
    세계적인 천재 아인슈타인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 안 되는 것이 바로 미국 연방 세법이라고 한 것은 그가 죽기 15년 전, 즉 그의 전성기 때였다. 세계적인 천재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까닭은 세법이 1861년 처음 만들어진 이후로 거의 매년 셀 수 없는 많은 개정을 해…
    세무회계 2023-06-30 
    “왜 그러는데?” 뭐가 그리 심각한지 잔뜩 짜증 섞인 내 말투에도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불 속에 있는 나를 부추겼다. 나는 눈이 아파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남편을 째려보았지만, 먹히질 않는다. 할 수 없이 나는 잡힌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툴툴대며 따라나선다…
    문화 2023-06-30 
    안녕하세요! 최근 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본격적인 ‘가성비’의 시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음식을 소개하는 시간이 아닌 우리가 시장을 볼 때 조금 더 현명하게 장을 볼 수 있는 간단한 상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번 내용은 미국생활에…
    문화 2023-06-30 
    한여름의 100도를 넘는 무더위가 텍사스를 강하게 강타하고 있는 이때에 이곳의 신선하고 향기로운 숲 속의 내음이 여름의 한 가운데 와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미국이 한증막에 휩싸여 있다고 표현할 만큼 전 미국이 엄청난 무더위에 신음하고 있을 이때 어딘가 삶을 재 충전하…
    문화 2023-06-23 
    미국 연방준비 위원들이 장장15개월에 걸친 금리 인상 행진을 멈추고 연방기금 금리 목표 범위를 5%-5.25%에 만장일치로 동결했다. 그러나 새로이 정리한 분기보고서는 금리 인상이 재개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연방공개시장위원회는 지난주 성명서에서 “이번에 목표 금리 범…
    세무회계 2023-06-23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오늘은 무더운 날씨에 우리의 에너지를 채워질 수 있는 한국의 대표 여름 보양 음식, 삼계탕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2019년 3월 중동지역의 나라중 하나인 UAE로 한국의 삼계탕 1,200봉, 약 1톤이 처음으로 수출되었습니다. 종교…
    문화 2023-06-23 
    이모는 듣기 버튼이 눌린 오디오북처럼 쉬지 않고 말을 했다.  심중에 저장해둔 이야기가 많았던 걸까? 아마도 그 책에는 쉼표가 없는 듯했다. 대상이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누군가 보이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경계하기도 하고 아이처럼 웃기도 하고 마음대…
    문화 2023-06-23 
    은퇴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위험은 인플레이션남아도는 시간, 충분치 않은 소득, 성치 않은 몸... 은퇴 후엔 싸워야 할 적들이 많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적은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인플레이션은 30~40년에 달하는…
    부동산 2023-06-23 
    2023년 6월의 진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흔적들이 달라스 지역을 휘감고 있습니다. 이름없는 나그네 무리들이 한바탕 웃음은 잠시 스쳐간 무더위를 달래는 간지 속에 관객을 사로잡고 객석과 호흡하는 많은 연주자들에게 무안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는 듯합니다. 살며시 컴퓨터…
    문화 2023-06-16 
    근래에 들어 한인타운내에 자체 건물을 짓는 한인 교민들도 많아지고 있다.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개인이 많아지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한인사회의 경제 규모가 커지고 있는 것도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지어져 있는 건물을 구입 하면서 그 건물을 커머셜보험에 가입…
    보험 2023-06-16 
    조세 회피, 영어로는 Tax Avoidance,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좀처럼 쉽게 들을 수 없는 단어임에는 분명하다.이젠 오랜 추억이 되었지만 IMF라는 영어 단어도 상당히 전문적인 용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생부터 80세 노인들까지 모두 아는 보통명사가 되어 버렸다…
    세무회계 2023-06-16 
    패티오에 있는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는데, 해가 졌는데도 여전히  더운 열기가 확 느껴진다. 호랑이 장가 가는 날처럼,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소낙비 내리는 날이 많아지고, 이웃동네 풀장이 바빠지고, 공원엔 오리가족 수가 부쩍 불어 인공호수가 좁아 보인다. 그늘진 곳에 …
    문화 2023-06-16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