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소담 한꼬집’ ] 맺음달 언저리에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1,340회 작성일 22-12-09 10:33

본문

내 컴퓨터가 아프다. 

환자로 치면 혼수상태다.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겠지만 글 쓰는 작가에게 컴퓨터는 신체의 일부 같아서 문제가 생기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명작을 쓰는 건 아니지만 손을 뻗으면 필요한 책이 있는 책장, 키 높이에 맞는 책상과 의자, 무엇보다도 창 두 개를 띄우고 작업할 27인치 모니터가 딸린 데스크 톱이 있는 내 공간이어야 졸작이나마 써진다. 익숙한 것들이 주는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정지용 해외문학상 시상식이 있어서 엘에이에 갔다. 가기 전에 그 동네와 우리 동네 일기 예보를 확인했다. 날씨를 알아야 옷 가방을 싸는 데 도움이 되어서였다. 양쪽 다 비 소식이 있었다. 벼락 치던 날 컴퓨터 하드를 날려 먹은 쓰라린 기억이 있어서 컴퓨터 전원을 끄고 갔다. 호텔에서 틈틈이 일하려고 일감을 챙겼는데 하지 못했다. 한 공간에 익숙해진다는 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닌 듯했다. 요즘은 몸도 낯을 가린다. 집에선 머리만 땅에 닿으면 일 분도 안 되어 잠이 드는데, 잠자리가 바뀌면 아무리 피곤해도 설 잠을 잔다. 화장실 문제도 해결을 못해 뱃속에 가스가 차서 나중엔 맛있는 거 많은 도시에서 먹는 게 반갑지 않다. 

 

집에 돌아와 밀린 일을 하려고 컴퓨터를 켰다. 경고문구가 뜨더니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껐다가 다시 켜 보았으나 열리지 않았다. 시커먼 먹구름이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컴퓨터는 내 비서이고 정보은행이고 일등 공신이어서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큰일이었다. 속도가 느려지는 전조가 있었다. 중간에 몇 번 손보긴 했지만, 칠팔 년 썼으니 꽤 오래 버텨준 효자였다. 기계는 믿을 게 못 돼서 자료 백업을 열심히 하는 편인데 최근에 일이 많아지면서 제때 하지 못했다. 꼭 그럴 때 문제가 생긴다. 보험 다른 회사로 바꾸면서 잠깐 공백 생길 때 차 사고 나고 수술할 일 생기고 뭐 사는 게 다 그렇다. 

 

결국, 컴퓨터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도와주는 지인에게 SOS를 쳤다. 그의 처방은 정확하다. 바이러스를 치료하거나 부속을 갈아 고치기도 하고, 다 밀고 다시 깔기도 하고, 수술해서 쓸 수 있게 해 주신다. 의사 같다. 집으로 가져가시는 걸 보니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다. 놀라진 않았다. 경험은 굳은살을 만든다. 같은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면 적당한 선에서 포기도 할 줄 알고 담담해지게 마련이다. 

 

지난 시월부터 수필 줌 강의를 하고 있다. 전화기에도 줌 앱이 깔려 있으니 강의는 할 수 있으나 합평하려면 강의안을 띄워야 하는데 자료가 모두 그 컴퓨터에 있어서 불러올 수가 없었다.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이 도져 수강생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수업을 접었다. 구글을 썼다면 전화기로도 자료 공유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잠시 들었으나 이미 지난 일이니 내려놓기로 했다. 기계 믿지 말고 작품은 수시로 엑스트라 하드에 저장하라고 강조했는데 정작 나는 최근 자료를 저장하지 못했다. 다 날린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선생님, 오늘 밤에는 컴퓨터가 없어서 할 일이 없겠어요.” 

수강생 중 한 분이 내게 문자를 남겼다. 컴퓨터가 없다고 할 일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전화기로라도 써서 넘겨야 할 원고가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돌아보니 작가가 된 후 늘 일이 따라다녔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사람이다 보니 앞만 보고 달리기도 바빴다. 사는 방식도 자가 격리형 인간으로 바뀌어서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았고 힘들었던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었다. 문학과 관련된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 심심할 틈이 없었다. 읽고, 쓰고, 책 만들고, 교정하고, 자료 검색하다 보면 좋아하는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줌 강의를 시작한 후론 수업 준비하고, 가르치고, 과제 피드백까지 하느라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연초에 많은 결심을 했었다. 다 이루진 못했지만 속한 단체에서 봉사하고, 체중감량도 하고, 나무달 아카데미에서 강의도 하며 나름 열심히 살았다. 목표만큼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써서 좋은 결과도 얻었다. 최선을 다했으므로 후회는 없다. 남편의 외조와 딸의 응원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상금은 고마운 남편 손에 쥐여주고 싶었다. 

 

어느새 2022년의 끝자락이다. 국내외 모두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비록 축구는 아쉽게 졌지만 끔찍했던 코로나의 터널을 벗어났고 우리에겐 또 다른 새해가 올 것임으로 희망을 걸어본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이마다 남은 한 해를 아름답게 마무리하시고 기쁜 성탄을 맞으시길 바라며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소망해본다. 

 

집을 비운 사이 우리 집 배롱나무에 단풍이 들었다. 지구 반대편엔 대설이 내렸다는데 내가 사는 곳은 동짓달임에도 만추 같다. 잎새마다 세상의 가을 색이 오롯이 담겨 얼마나 고운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빗물을 머금은 잎들이 바람 불 때마다 떨어져 낙엽이 된다. 제 몫을 다하고 떠나는 모습이 처연하고 아름답다. 나는 세상을 떠날 때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그게 시였으면 좋겠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2022년이 시작되나 싶더니 벌써 12월 중순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나의 조그만 작업실 창문너머로 부슬 부슬 떨어지는 겨울비에 사뿐히 떨어지는 빨간색 메이플 트리의 나뭇잎을 바라보며 삶이란 지나가는 시간을 세월이란 일기장에 빽빽하게 적어놓고 있습니다. 가…
    문화 2022-12-16 
    사업체를 운영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한인 사업 경영자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고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잠재적 사고위험은 비지니스 매출의 저조함보다 더 위협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작은 사고위험이 때로는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타인의 재산에 큰 피해를 초래…
    보험 2022-12-16 
    2022년도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시중에 돈이 넘쳐나던 작년 이맘때와는 다르게 가파르게 진행된 금리 인상과 인플레이션 때문에 대다수의 경제 전문가들은 내년에 경기 침체가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2022년에는 많은 분들이 주식이나 가상화폐 거래로 손실이 많이 발생…
    세무회계 2022-12-16 
    아침에 수도꼭지를 틀어 세수를 하려는데 느낌이 차다.  하와이의 물은 늘 미지근하다는 생각이었는데 오늘따라 찬 느낌은 뭘까. 하와이에도 가을이 온 것이다. 11월부터 허리케인 시즌이 되어 거친 비 바람이 몰아친다. 기온도 약간 내려가 2월까지가 겨울인 셈이다.  차가워…
    문화 2022-12-16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혹시 미슐랭 가이드라는 책자를 들어보셨나요. 보통 식당의 등급을 매겨서 고객들에게 유명한 식당을 알리는 책자입니다. 식당들은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이 책자에 이름을 올리고,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오늘은 조금은 생소할…
    문화 2022-12-16 
    세상의 아름다움은 계절의 시계를 따라 세월을 흐르게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휴식도 없이 바쁜 삶의 여정이 이어질 때라도 평화로움으로 여행을 떠나는 마음은 사랑 가득 담은 연인에게 달려가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무더웠던 텍사스의 여름, 그렇지만 벌써 11월의 청명한…
    문화 2022-12-09 
    중동의 한 가운데인 카타르에서 월드컵 축구대회가 한창이다. 아마도 단일 종목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행사로,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해서 매 4년마다 열리는 것이고, 올림픽이 도시를 중심으로 개최되는데 반해 월드컵은 국가가 중심이 되어 열린다는것에 그 차이가…
    세무회계 2022-12-09 
    내 컴퓨터가 아프다. 환자로 치면 혼수상태다.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겠지만 글 쓰는 작가에게 컴퓨터는 신체의 일부 같아서 문제가 생기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명작을 쓰는 건 아니지만 손을 뻗으면 필요한 책이 있는 책장, 키 높이에 맞는 책상과 의자, 무엇보다도 창 두 개를…
    문화 2022-12-09 
    한국 축구대표팀은 카타르월드컵에서 뜨거운 열정을 마음껏 불살랐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카타르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화두가 된 말이다. ‘꺾이지 않는 마음’은 곧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주장 손흥민이 그 한가운데에 있…
    부동산 2022-12-09 
    산과 계곡이 아름다우며 무성한 숲과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는 알칸소의 아침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싸늘한 12월의 한기는 핫 스프링스(Hot Springs)를 둘러싸고 있는 헤밀톤 호수에 내려 아침 일찍 피어 오르는 물안개가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문화 2022-12-02 
    신문을 읽다보면 가정집의 관리 유지를 위하여 고용한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 제공자들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집 주인이 법적 보상책임을 떠 맡아야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당신의 잔디를 정규적으로 깎아주는 회사나, 당신이 없는 동안 아기를 돌봐주는 이…
    보험 2022-12-02 
    December – 12월은 인디언 고유 언어로 “한 달이 아직 남아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 달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같은 뜻이겠지만 “아직도 한 달이 더 남아있다”라고 뜻풀이를 하는 인디언 문화는 사물의 양면 중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만 보려 했던 …
    세무회계 2022-12-02 
    오늘은 의외로 많은 분들이 가지고 계시고 발생 확률이 약 50%가 넘을정도로 흔한 손목 터널증후군에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시간 컴퓨터 키보드와 마우스를 사용하는 분들이나 손목에 반복적으로 힘을 가하거나 움직여야 하는 직업을 가지신 분들 중에 손목과 손가락…
    건강의학 2022-12-02 
    이번 추수감사절은 새벽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며칠 전에 산 터어키를 냉장고에 두었었는데, 전날 만져보니 등 부분이 아직 덜 녹은 것 같아 키친탑 위에 두고 잠을 잤다. 올해는 터어키는 굽지 말고 갈비와 사이드 디쉬만 만들어 먹자고 했지만, 막상 추수감사절이 가까워…
    문화 2022-12-02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단백질과 비타민이 풍부하게 들어있고 동맥경화, 고혈압, 골다공증 그리고 암을 예방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외국인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김을 먹기 시작한 것은 기록상으로는 한중일 중 한국이 …
    문화 2022-12-02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