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만남에 대하여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1,386회 작성일 22-11-25 11:00

본문

가을이 겨울로 떠나려고 오늘도 수선을 떱니다. 날은 점점 더 일찍 어두워지고 무성해 그늘도 짙었던 앞마당의 물푸레나무는 서둘러 옷을 벗느라 찬바람을 자꾸 불러들입니다. 마당 가득 쌓인 낙엽은 그 바람에 어쩌지 못하고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마당만 어질러 놓고 맙니다.

다 저녁때 한국에 있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얼굴 볼 날도 며칠 안 남았다며 내 스케줄을 다시 확인합니다. 한국행 비행기 표를 예약할 때만 해도 까마득했는데 벌써 떠날 날이 내일모레로 다가왔습니다. 두 주를 잡았지만, 오고 가는 날을 빼면 두 주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거기다 평통 미주지역회의 3박 4일과 1박 2일 건강검진을 빼면 겨우 일주일이 될까 말까 한 일정입니다. 친구는 남편이 휴가를 주었다며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올라와 나와 함께 주말을 보내겠다고 신이 났습니다. 그 친구는 항상 그랬습니다. 늘 기다려주고 함께해 주었습니다. 

오늘도 전화해서 하는 첫 마디가 ‘미희야 우리는 꼭 만나야 하는 운명인가 봐.’ 같은 반이 아니었어도 하굣길에 늘 기다려 주었습니다. 가방을 오른손에 잡는 내 버릇으로 그 친구는 왼쪽 어깨가 내려앉았을 정도로 배려가 깊은 친구였습니다. 시간을 요리조리 쪼개서 써야 할 판이지만,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그러자고 선뜻 대답하고는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며칠 더 묵으면서 여유를 가질 수도 없고, 잘못하다가는 고향에도 못 가고 돌아와야 할 것 같은 예감에 벌써 마음이 불편합니다. 가고 싶은 곳을 가기는커녕 보고 싶은 얼굴들도 못 볼 것 같아 아예 연락도 못 하는 상태입니다. 토요일마다 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해야 하고 한국에 가면 연극 두세 편은 꼭 봐야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연극을 하는 친구가 공연 스케줄을 알아본다고 했으니 두고 봐야겠습니다.

30년 만에 친구들을 만났던 2016년 겨울이 생각납니다. 그해 2월 ‘늙은 부부 이야기’ 연극 공연차 시애틀에 갔을 때였습니다. 새벽에 한국에서 걸려 온 전화, 모르는 번호라서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받았는데 그게 바로 휴가 내서 올라온다는 친구였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YTN 뉴스 보는 게 일상이던 친구는 68세 이점순 할머니로 분장한 짧은 인터뷰 영상에서 나를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구글링해서 기사를 찾아내 기사에 실린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었습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민 초기 몇 년은 열심히 편지도 쓰고 전화해서 가끔 목소리도 들으면서 지냈는데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연락이 끊어진 줄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그것도 뉴스 채널에서 친구가 내 모습을 알아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잊고 살았던 세월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겨울 한국에 나간 나는 잊고 있었던 친구들과 재회했습니다. 내가 묵고 있는 좁은 호텔 방 좁은 침대에 네 명이 엉겨서 밤샘했고 또 다른 팀의 친구들은 여럿이어서 아예 친구 집에 모여 옛날이야기로 통밤을 새웠습니다.

 한국에 갈 때마다 이상하게 꼭 부산 해운대는 다녀오곤 했습니다. 연고도 없는 데다 딱히 추억이 있던 것도 아닌데 혼자서라도 꼭 다녀오곤 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보고 싶은 친구가 그것도 요리조리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던 친구가 바로 해운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자석으로 나를 끊임없이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연고도 추억도 없는 내가 그 먼 부산 해운대를 찾아가 돼지국밥에 소주 한잔으로 가슴을 데우고는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던 것이었습니다. 

2016년, 그해 겨울 그 친구도 수소문 끝에 찾았습니다. 서울 숙소에 짐을 풀고 그 길로 마지막 열차에 올라 친구에게 카톡을 날렸습니다. 

부산역에 내리니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0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둥근 안경을 쓰고 활짝 웃는 모습이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우리는 옛날처럼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그 밤에 해운대를 향해 걸었습니다. 

울다 웃으며 또 소리쳐 서로를 부르면 큰 소리로 대답하며 30년의 벽을 탕탕 허물었습니다. 24시간 영업하는 복집, 따뜻한 마루에 앉아 지난 세월을 풀어 넘치게 잔을 채우고 서로를 담아 마셨습니다. 출근길에 해장하러 온 손님들한테 떠밀려 나온 우리는 해운대 모래사장에 누워 푸른 하늘을 끌어안고 밝아오는 날을 맞이했습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문예지에 실린 내시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꼭 나일 거라 믿었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사는 나를 응원했다며 밤새 씩씩하던 친구는 소리 내 울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났다며 내가 한국에 오면 둘이서 꼭 마중 나오겠다고 30년 전에 온 친구의 마지막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를 영영 놓쳐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정말 많이 행복했다고 합니다. 30년 동안 그 친구는 좋은 사람과 결혼했고 딸과 아들, 두 아이를 낳았고 미국에 와서 잠시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부산에 터를 잡았답니다. 

두 해 전에 암 투병 중에 영영 떠난 사람이 그 좋은 사람이 너무 그립다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친구는 너무 오래 참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오래오래 참고 있을 눈물꼬를 터주러 가려고 합니다. 아직 내가 가고 있다는 말은 안 했지만, 초강력 자석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으니 그때처럼 부산행 마지막 열차에 올라 내가 가고 있다고 그 옛날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으라고 급전을 보내야겠습니다.

단 며칠이라 해도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내게 있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떠나는 시간이 길수록 미리 처리해야 하는 일도 많아 떠나기 전에 미리 지치고 맙니다. 가을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습니다. 

 

가을비    / 김미희


조용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가

정말 멍청히 바라보다가

며칠 전에 노래방 갔던 일 생각이 났네


즐겨 부르던 노래라 

부를 때마다 자신이 붙던 18번 나의 노래 듣고 싶다며

'마야의 진달래꽃'을 올려놓은 친구는 

벌써부터 지긋이   

자박자박 내리는 소리를 그려보고 있는 게 분명해 

내 딴 최상의 목청이라 싶게 뽑았는데 

이를 어쩌나

뒤집힌 목소리에 스탑! 스탑을 걸고 말았네


아직도 그늘 싱싱하고 창창한 젊음인 줄 알고

휘두른 붓이 뚝 부러지고 

숨어 있던 부끄러움 '김수희의 너무합니다'를 히잡 삼아 

얼굴 감싸고 나왔지


나도 가을이니까 

조용히 가을비가 되어야 마땅해

역시


김미희
시인 /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다니엘이 질병수당을 받기 위해 고용연금센터에서 자신의 건강상태를 체크 받는다. 그런데 의료전문가의 질문이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자, 다니엘이 계속 답을 하다가 “난 심각한 심장마비로 추락사 할 뻔했던 사람이에요” 하고 말한 다음, “다…
    문화 2022-12-02 
    우리는 종종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수없이 방황을 하곤 합니다. 꿈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곤 합니다. 불안한 경제, 정세, 어느 것 하나 우리의 현실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없습니다. 시원한 가을의 내음을 품으며 좀더 차분해지려…
    문화 2022-11-25 
    가을이 겨울로 떠나려고 오늘도 수선을 떱니다. 날은 점점 더 일찍 어두워지고 무성해 그늘도 짙었던 앞마당의 물푸레나무는 서둘러 옷을 벗느라 찬바람을 자꾸 불러들입니다. 마당 가득 쌓인 낙엽은 그 바람에 어쩌지 못하고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마당만 어질러 놓고 맙니다.…
    문화 2022-11-25 
    바다건너 고국은 최근 방한한 무하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지구상에서 처음 시도되는 네옴 시티 건설 외에도 방산·원전·문화관광·수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과의 파트너십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이란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한국의 공중요…
    세무회계 2022-11-25 
    안녕하세요! 제법 쌀쌀해진 11월말 추수감사절 시즌입니다미국의 추사감사절은 한국의 ‘추석’과 비슷한 명절입니다. 가족 혹은 친지들과 모여서 터키와 다른 맛있는 것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이런 큰 명절에는 평사시와는 다른 특별한 음식을 먹기도 하…
    문화 2022-11-25 
    부동산으로 큰 돈을 벌게 된 부자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어떻게 그들은 남들보다 빠르게 부동산 정보를 찾고, 또 이를 어떻게 활용하여 재테크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 도대체 그들만이 지닌 습관은 무엇인가? 오늘은 부동산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의 투자하는 습관과 방법…
    부동산 2022-11-25 
    늦은 가을 저녁 무렵에 가을을 담아봅니다. 불빛이 만들어 내는 보케와 같이 알록달록한 가을의 풍경은 흐린 날씨에도 그 흔적을 숨길 수 없나 봅니다. 날씨 탓하지 않게 촉촉히 늦은 가을비가 내리지만 그 색깔의 찬란함은 서둘러 돌아오는 텍사스의 겨울을 시샘하나 봅니다. 세…
    문화 2022-11-18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집을 위한 집보험이 필수적이듯이 상업용 건물 소유주에게는 상업용 건물보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면 이런 상업용 건물의 보험료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보험료가 책정되는 것인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기본적인 보험료 산출은  보험회사가 예측하는 손…
    보험 2022-11-18 
    “요즘들어 ‘정말 빠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만큼 빠른 세월의 속도감을 느낀다. 세월의 속도를 자동차 속도에 빗대어 20대는 20마일, 30대는 30마일, 40대는 40마일의 빠르기로 지나간다는데 역시 맞는 말인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황이 우리의 발목을 잡…
    세무회계 2022-11-18 
    구독자 여러분. 오늘은 요즘 한국의 식품업계에 불고 있는 소식 하나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바로 한국 음료업계에 불고 있는 ‘제로 슈거’ 트렌드 인데요. 많은 한국 식품회사에서 차, 에너지드링크 등 기존과 다른 음료 라인업도 ‘제로’ 제품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간 축적한…
    문화 2022-11-18 
    아름다운 가을의 음악들이 11월의 계절 속으로 솜털처럼 풍성한 갈대꽃을 살랑살랑 흔들며 가느다란 잎사귀에 스쳐 아름다운 갈대 잎의 하모니를 만들고 있습니다. 벌써 11, 세월이 아무리 빠르다 그래도 눈 앞에 스쳐 지나가는 잊혀지는 추억들 보다 빨리 지나가랴…… 어떤 일…
    문화 2022-11-11 
    바다건너 고국은 지난 10월 29일 오후 10시 15분에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할로윈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해밀톤호텔 앞 좁은 골목길로 인파가 밀리면서 사상자가 다수 발생한 이태원 참사를 당했다. 이 사고로 15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299명이 사…
    문화 2022-11-11 
    올가을에도 우리 집 분꽃은 분주했던 여름 여행을 마치고 실한 열매를 맺었다. 지난번에 씨를 한바탕 거두었는데도 여전히 많았다. 아직도 전해줄 게 남은 모양이다. 뜨거운 텍사스의 땡볕과 가뭄을 견뎌낸 분꽃은 이제 기력이 쇠했는지 대가 휘고 가지가 인도까지 내려와 배를 깔…
    문화 2022-11-11 
    연말, 연초가 되면 크리스마스, Thanksgiving, New Year 등 다양한 기념일을 맞이합니다. 기념일에는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요. Covid-19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집에서 더 맛있고 인스타그래머블한 음식을 준비하…
    문화 2022-11-11 
    경제적 어려움은 늘 삶을 좀먹는다. 나아가 정신을 피폐하게 한다.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사회 또한 불안해졌고 중산층이 얇아지면서 빈곤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 먹고살기 빠듯한 상황에서 부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허망한 꿈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동산 2022-11-11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