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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Girls’Night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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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1,417회 작성일 22-10-2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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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친구 여섯이 주점 안에 있는 노래방에 둘러앉았다. 얼마만 인가. 코비드가 판을 치기 전이었으니 족히 4년은 되었지 싶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저녁 겸 안주로 상차림을 푸짐하게 준비하고 소주와 맥주도 얼음 바게트에 넉넉히 채웠다. 일단 허기진 배부터 채우며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얘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30년 전에 만난 동갑내기 친구로 인해 이래저래 알게 된 친구들. 모든 변화를 함께 보고 겪은 동갑내기 친구는 나와 생일도 보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매년 5월에 생일 파티를 함께 해왔다. 오늘은 특별히 미네소타에 사는 친구가 다니러 왔기 때문에 그 친구가 좋아하는 노래방에서 만나게 되었다. 

 

적당히 배가 차오르기 시작하자 첫 주자로 마이크를 잡은 건 역시 이제 막 오십 줄에 앉은 우리 중에 가장 젊은 친구였다. 아홉 살 때부터 아버지가 좋아하신 배호, 이미자 씨 노래를 따라 불렀다며 ‘동백 아가씨’를 아주 구성지게 부르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노래를 생각지도 못 한 사람한테서 듣고 나니 뒤통수를 세게 한 방 맞은 것같이 얼얼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몇 살 차이 안 나는 젊은 친구가 부러웠다. 나도 한때는 머뭇거림 없이 마이크를 잡고 열창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거침없이 쏟아내던 당당한 열정이 있었다. 노래가 좋아서 음악이 좋아서 턴테이블을 어둡도록 돌리던 시절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다고 엄마가 그러셨다. 농사일 돕기 싫은 언니가 나를 업고 친구네로 놀러 가면 나는 혼자서 흥얼흥얼 노래 부르며 코스모스 길을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런 막내딸을 아버지는 참으로 예뻐하셨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로 노래 경연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오곤 했다. 양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도 마이크 잡으면 놓질 못하던 젊음이 있었다. 노래가 나를 위로하고 세워주던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술기운이 좀 돌아야 노래가 나온다. 친구 말대로 맨정신으로는 부를 자신이 없어 슬슬 뒤로 빼며 머뭇거리는 것이다.

 

‘이따가’ 를 외치며 무겁게 앉아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친구의 신청 곡 때문이었다. ‘마야의 진달래꽃’. 제목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 곡은 나의 애창곡이었다. 마이크를 잡기만 하면 온갖 품을 잡고 꼭 불러야 했던 노래였다. 하지만, 끝까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망설일 일도 아니었다. 더더욱 용기를 내면 안 되었다. 그래도 시작은 그럴싸했다. 좋았다. 적당히 술기운도 돌고 있었으니 이만하면, 어쩜 멋지게 해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어쩌면 좋단 말인가. 순간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뚝뚝 끊기는 것이었다. 높은음을 타기는커녕 스치지도 못했다. 아차, 하는 순간 놓쳐버린 박자에 나는 그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망했다. 이렇게 하나씩 내려놓아야 하는 건가 보다. 욕심부릴 일이 따로 있고 욕심부릴 때가 따로 있나 보다. 절대 안 된다고 다음에 꼭 연습해서 들려주겠노라고 미안해하며 끝까지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어야 했다. 

 

새벽부터 내린 가을비가 종일 내리더니 밤까지 적시고 말 모양이다. 오늘따라 가을비가 처량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자꾸 뒤를 돌아보는 사람처럼 저벅저벅 내린다. 잠깐씩 숨을 고르는지 아니면 어제의 수치라도 지우고 오는지 쉬었다 내린다. 내 목소리만큼이나 힘이 다 빠진 비, 줄기. 비 그치면 추워질 일밖에 없다는 걸 알아서일까. 그래, 가을비가 요란하면 쓰겠나. ‘김수희의 너무합니다’를 부르면서 안도하던 나. 주름진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도 마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위로하며 ‘너무합니다’로 만족하자고 다시 다짐한다.

 

 가을비도 한 때는 봄비였다. 싹을 품고 통통 뛰어내리던 비 말이다. 멀리멀리 갈 수 있을 것 같아 연두 냄새로 가득 찼던 비. 그러다가 세상을 다 가진 듯 천둥번개로 살아 있음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거침없는 행보였다. 나름대로 힘이 있던 빛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건 봄이었고 여름이었기에 빛이 났었다. 가을에는 가을에 어울리는 비가 내려야 제격이다. 아무한테도 걱정이 되어서도 폐가 되어서도 안 되는, 그저 조용하게 내려야 하는 게 가을비다. 내년이면 나도 싫든 좋든 육십 줄에 들어선다. 이제부터는 조용하게 적시고 소리 없이 익히는 가을비가 되어야 한다. 

 

여기까지 따라오느라 목소리도 지친 것이다.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 내었으니 목이 갈 때도 되었다. 거친 붓끝이 치고 간 일필휘지의 목소리는 잊어야 할 때가 되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제부터는 노랗게 발갛게 물들이는 가을비처럼 톤을 조금 내려서 부르는 연습을 해야겠다. 잘 익은 목소리로 잔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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