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국화 앞에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709회 작성일 23-10-20 13:21

본문

“어떻게 살아야 할까?” 꿈인 듯 생시인 듯 잠 속에서도 추위를 느끼며 밤을 보낸 아침, 눈을 뜨면서 내게 하는 첫 질문이었습니다. 

자주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늘 묻고 싶었던 질문, 평생을 품고 온 질문이 추위에 견디면서 밤을 보낸 다음 날 첫 질문이라고 해서 답이 떠오를 리는 만무합니다. 

얼마나 웅크리고 잠을 잤는지 기지개를 켜는데 몸이 펴지질 않습니다.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는데 벌써 갈아입은 두툼한 잠옷과 수면 양말이 소용이 없으면 어쩌나 생각하다가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아직 에어컨 아래서 일을 하다 보니 히터가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습니다. 추위에 떨면서도 히터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니, 지난여름이 정말 길고 잔인했던가 봅니다.

구겨진 몸을 생각해서 오랜만에 공원 산책을 하기로 했습니다.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에 버릇처럼 썬크림을 펴 바르고 모자를 눌러썼습니다. 

해가 뜰 무렵, 얼마 전부터 나는 이 시간이 좋아졌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잘 만나 볼 수도 없던 시간이었고 작년보다 더 야행성이었던 젊었을 때는 절대 일어나 움직이는 시간이 아닌, 내게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빛이 낮게 엎드려 있는 시간. 아직 그림자를 달고 있지 않은 빛이 아주 조심스럽게 세상으로 걸어와 모든 사물에 그림자를 채워주는 시간. 이 순간을 지켜보는 게 좋습니다. 누워있던 세상이 황금빛으로 일어서는 것 같아 가슴이 떨립니다. 

공원 산책길은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항상 가던 길 말고 오늘은 풀숲을 지나 오솔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나무들은 저들만 물들이는 게 아니라 세상까지 물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한결 가벼워진 모습으로 바람을 타고 있습니다. 나도 오늘의 나무만큼만 가벼워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습니다. 사람들의 발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지나가고 또 지나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도 들립니다. 

가끔 조금 세게 사선으로 부는 바람은 오늘따라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가슴을 씻겨주고 머리를 맑게 열어줍니다. 오늘은 쫓기듯 걷기보다는 마실 나온 사람처럼 여유를 부리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한 시간이면 족했던 산책길이 오늘은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습니다. 가끔은 나사 하나쯤 풀어놓고 느긋해진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도 좋습니다. 

집에 당도하니 대문 앞 노란 국화꽃이 팝콘을 튀겨 놓고 마중을 나왔습니다. 엊그제만 해도 몽글몽글 꽃망울들의 소곤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어떤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났길래 참지 못하고 한꺼번에 웃음이 터진 걸까요. 궁금해 국화꽃 앞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나도 따라 웃어봅니다. 

가만가만 꽃잎을 어루만지는데 어릴 적 엄마 치마폭에서 묻어나던 냄새가 콧등을 치며 달려듭니다. 영락없는 엄마 냄새였습니다. 그 옛날 엄마한테 조르듯 무슨 이야기였는지 알려달라고 떼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국화꽃은 조용히 웃음을 머금은 채 슬슬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는 바로, 매일 아침 그냥 지나쳐 가는 나를 불러 옆에 앉히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을볕에 앉아 국화꽃 향기에 취해 한나절쯤 쉬다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매일 바쁜지 잠시 쉴 틈도 없이 아침에 나가면 달이 떠야 들어오는 내 일상이 안타까웠던 모양입니다. 이렇듯 자연은 심심찮게 우리의 일상을 엿보다가 엄마 치마폭에 묻어있던 국화꽃 향기로 손짓합니다. 

삶에 지쳐 허덕일 때면 붉은 단풍도 책갈피에 끼워주고 눈사람도 한두 개쯤 만들게 합니다. 그러면서 늘 우리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에서 슬그머니 내려다 보시는 진짜 하나님과 눈 맞출 때도 있습니다. 바쁘게 걷던 걸음을 돌려 샛길로 들어서면 작년에 만났던 쑥부쟁이와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가을이 좋은 건 노란 국화꽃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꽃이 피고 진 다음 늦게 찾아와 쓸쓸한 마당을 은은한 가을빛으로 채우는 국화꽃이 좋습니다. 양팔로 안을 수도 없는 화분에 다닥다닥 정답게 피어있는 국화꽃이 있어 마음이 포근해집니다. 

국화꽃을 보고 있노라면, 외롭지 않게 마음껏 정 나누며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 앞서지도 그렇다고 많이 쳐지지도 말고 그저 평범하게 남들과 발맞추어 가는 그런 삶을 꿈꾸게 합니다. 몸 뒤척일 때마다 연한 향기가 퍼지고 가을 햇살이 오래 머물 수 있는 가을 국화꽃처럼 말입니다. 

환한 웃음이 아니어도 꿀벌 몇 마리쯤 날아와 이야기꽃도 피우는 수수하고 솔직한 모습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편하게 바라보고 대할 수 있는 가을 국화꽃처럼 천천히 다가와서 오래 머물다 가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국화꽃 앞에 앉아 작년에도 그전에도 했을 생각으로 행복한 가을 아침입니다. 

 

들국화

               

        김미희

 

뜰이 비워지고 나서야

가을볕에 그은 노오란 꽃

쓸쓸해서

오히려 낭만이라고 고개를 드는가

 

엄마 치마폭에 묻어있던

그 향

가을이 되어서야

가을이 되어서야

내 눈시울에 비쳐지네

 

김미희

시인 /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 Carrollton, TX 75007바다건너 고국은 약 한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 정국…
    세무회계 2025-05-09 
    박인애 (시인, 수필가) 딸이 내게 ‘Pride & Prejudice’라는 영화를 아느냐고 물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소설을 영화로 제작한 건데, 방영 20주년을 맞아 4월 20일에 재개봉 한다며 핸드폰을 열어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오만과 편견’이었…
    문화 2025-05-09 
    에밀리 홍 원장결과가 말해주는 명문대 입시 전문 버클리 아카데미 원장 www.Berkeley2Academy.com 문의 : [email protected]년 봄에 발표된 올해 미국 대학 입시(Class of 2029)의 결과는 한마디로 “사상 최저 합격률”…
    교육상담 2025-05-09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소중한 유타(Utah)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달라스로 돌아오니 텍사스 5월의 날씨라고 하기엔 아직도 쌀쌀한 텍사스의 이상 기후가 메마른 땅을 흠뻑 적시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선 유타주의 주도인 솔트 레익 시티(Salt Lake …
    문화 2025-05-09 
    크리스틴 손, 의료인 양성 직업학교, DMS Care Training Center 원장(www.dmscaretraining.com / 469-605-6035) “의료계 고용 성장률 평균의 2배! 지금 뜨는 직업, Medical Assistant(의료보조)”미국의 의료 …
    문화 2025-05-09 
    ◈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문화 2025-05-02 
    공인회계사 서윤교  소득세 없는 텍사스, 재산세는 필수미국 50개 주 가운데 텍사스는 대표적인 ‘무소득세 주’ 다. 주정부 차원의 소득세가 없다는 점에서 은퇴자나 자영업자,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곳이다.  하지만 그만큼 재산세(property tax) 부담은 상대적으로…
    세무회계 2025-05-02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테네시주(Tennessee)를 여행하다 보면 이외의 곳에서 생소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달라스에 사는 많은 이들이 뉴욕의 동부 혹은 아틀란타의 남부로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도로 곳곳에 널린 미국의 유수 관광지나 역…
    문화 2025-05-02 
    당신은 집보험이나 자동차 보험에 가입할때 당신의 크레딧 점수에 따라서 보험료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대부분의 자동차나 집보험 회사에서는 당신의 보험료를 산출하는 과정속에 크레딧 점수를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당신의 크레딧 정보가 …
    보험 2025-05-02 
    조진석 DC, DACBR, RMSKProfessor, Parker University Director, Radiology Residency Program at Parker UniversityVisiting Fellowship at the Sideny Kimmel Med…
    건강의학 2025-05-02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공학 시스템을 이해하는 기초적인 접근법은 시스템에 입력을 주었을 때 어떤 출력이 나오는지 보는 것이다. 예컨…
    문화 2025-04-30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세무보고 시즌이 마감되었다. 하지만 적지않은 납세자…
    세무회계 2025-04-30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저는 이 십년만에 아틀란타 옷수선 가게를 접고 수원에 정착했어요, 무엇보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말 때문에 긴장 안 해도 되니 살 것 같네요.-부럽네요, 저는 아이들이 어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역이민은 이왕 하려면 빨리 하는 …
    문화 2025-04-30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2025년이 시작이 된지 어느덧 5월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달라스의 봄은 미국의 어느 곳보다 빨리 찾아와 3월이면 벌써 온 대지에 봄기운이 가득하여 수많은 꽃 축제와 더불어 각종 페스티벌이 곳곳에서 시작을 알리곤 합니다. 특히…
    문화 2025-04-30 
    조나단 김(Johnathan Kim)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졸업- 現 핀테크 기업 실리콘밸리   전략운영 이사인공지능(AI)은 더 이상 공상과학 소설의 소재가 아니다. 준비 여부와 관계없이 AI는 이미 우리 일상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최근 주목받…
    교육상담 2025-04-30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