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가 붉게 물이 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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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까지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나봅니다. 일어나보니 컴퓨터 위에 하트 모양의 붉은 단풍 한 잎이 놓여있습니다. 물러가지 않을 것 같던 달라스의 폭염도 가을비에는 당할 수가 없나 봅니다.

며칠 사이에 거리는 붉게 물이 들었고 우리 집 앞마당에는 단풍 든 물푸레 나무가 아름답습니다. 황금빛 조각달들이 가을 아침 하늘에 가득합니다.

매일매일 기다리더니 남편은 벌써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단풍이 든 나무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나 봅니다. 이 낙엽은 어디에서 어떻게 남편의 눈에 들어 내게 온 걸까요.

엄지손가락만 한 낙엽을 보고 있자니 고단한 내 몸을 보는 것 같아 물푸레 나무 황금빛 탄성도 사라지고 우울해집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얼마나 가슴 졸였으면 제대로 크지도 못한 걸까요. 벌레한테 먹히고 비바람에 찢기고 패이면서 하트모양이 될 때까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온갖 힘든 상황을 견디고 나면 못난 모습이라도 누군가의 눈에 들 수 있을 거라 생각이나 했을까요.





기다리던 일요일이지만 늦장을 부리고 있을 여유가 없는 날입니다. 올해로 4회째 열리는 코리안 페스티발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모내기 시연에 필요한 농민복과 함께 사용될 머리띠와 머릿수건에 이어 마지막으로 허리띠를 만들어 4시까지 연습장으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어젯밤에 천을 사다놓았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가게에 나와 자르고 박아 뒤집고 다리기까지 4시간이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오산이었습니다. 어딘가에서 단풍물이 흠뻑 들어 있을 남편에게 SOS를 쳤습니다. 고맙게도 근처에 있어서 금방 달려와주었습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나는 연습장을 꽉 채운 사람들로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이들부터 어른, 장애우까지 우리 한인 뿐만 아니라 타민족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모두 한국에서 급조해 온 농민복으로 갈아입고 여자는 머릿수건을, 남자는 머리띠를 하고 양손에는 벼 포기를 들고 ‘옹헤야’ 노래에 율동을 맞춥니다.

코리안 페스티발 3회를 하는 동안 이곳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돕지 못해 늘 미안했습니다. 행사가 토요일에 있으니 가게 문을 닫은 저녁에나 들러 행사가 끝나면 청소하는 정도 밖에 도울 수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올해는 아예 가게 문을 닫고 아침부터 참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미력하나마 재능기부도 할 수 있어 기쁩니다.





한 번도 모내기를 해보기는 커녕 구경도 못 해본 사람들이 많을텐데 몇 번이고 반복되는 율동에 얼굴이 붉게 단풍처럼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타민족 친구들도 음악에 맞춰 율동을 익히느라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농민복이 불편할텐데도 싱글벙글합니다.

보고 있자니 어렸을 때 모내기 하던 생각이 났습니다. 모내기나 추수할 때는 늘 잔칫날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엄마는 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미리미리 김치를 담그고 감주를 만들고 도라지를 캐서 다듬었습니다.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일하러 온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전부인 일꾼들에게 담뱃갑을 돌리고 새참이 되면 막걸리에 국수나 부침개를 만들어 머리에 이고 갑니다. 물이 찰랑거리는 논에 일렬로 나란히 서서 양쪽에서 팽팽하게 잡아주는 모 줄에 맞춰 모내기 하는 광경은 일품이었습니다.

큰 가마솥에 밥을 하고, 무 숭숭 썰어넣고 오징어 찌개도 하고, 기름 둥둥 뜬 고깃국도 끓입니다. 오이 넣고 매콤시큼하게 무친 도라지 홍어회 무침과 풋고추 썰어 넣은 갈치조림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돕니다.

음식을 담은 고무대야를 똬리 받쳐서이고 힘겹게 일어서던 엄마가 눈에 선합니다. 한 손은 머리에 인 고무대야를 잡고, 한 손은 국이 가득 담긴 들통을 들고 앞서가는 엄마 뒤를 숭늉 주전자를 들고 흥얼대며 따라가던 나는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들 밥은 또 왜 그렇게 맛있는지요.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을 큰 소리로 불러 막걸리도 음식도 나눠 먹으니 동네잔치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점심이 끝나고 다시 새참을 챙기고 나면 저녁이 됩니다.

어둑어둑 해지면 일꾼들은 냇가로 가서 씻고 대청마루에 차려놓은 저녁을 시끌벅적하게 먹습니다. 술기운이 거나해진 일꾼들이 돌아가면 엄마는 수돗가에 앉아 큰 고무대야 가득 설거지를 하고 봄밤은 고단하게 깊어갑니다. 이젠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아마 시골 농촌에서도 이런 풍경은 볼 수 없을 겁니다. 다같이 돌아가면서 거들어주던 ‘품앗이’라는 아름다운 용어도 잊히지는 않았는지 모릅니다.





모내기 시연 연습이 끝나고 다음 팀 연습을 준비하는 동안 또 다른 팀은 건물 밖에서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아이돌 두 팀과 국악협회에서 50여 명이 출연할 예정이지만 달라스에서 준비하는 나머지 45개 팀들은 거의 아마추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차질없이 발휘하려고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게 아니고 기쁜 마음으로 동참해서 그런지 하나같이 단풍처럼 곱게 물든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아침 10시 30분부터 시작해서 밤 9시 30분까지 11시간 동안 무대가 채워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4회째 기획하고 준비하느라 애쓰신 한 분 한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행사가 풍성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재능기부도 하고 아낌없이 후원해주신 소중한 분들도 잊어선 안 되겠지요. 부디 올 행사도 물푸레나무 황금빛 이파리처럼 파도를 일으키길 기원해봅니다. 그래서 4회가 5회가 되고 10회, 20회가 되어서 다음 세대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다 같이 한마음이 되어야겠습니다.
코리안 페스티발은 달라스 한인 모두의 잔치입니다. 우리가 모두 주인입니다.





가을 축제 / 김미희





가을비 그치고

하늘은 맑고

만국기 펄럭이고

천막들이 저마다 들썩이는 일일장 섰다





떡메 내려치는 소리

고소한 참기름 냄새

가슴에 익은 풍악소리에

물 위에 떠돌던 이민 살이 가슴들

하나둘 모여들어

홍시 따던 장대로

때마침 가까이 내려온 슈퍼 문(super moon)

저마다 톡톡 건들어 본다





막걸리 한 사발에 어깨가 들썩

이제는 낯선 사람 하나 없다

얼쑤, 신명나게 한 가락 뽑아대고

까르르 웃음소리, 폭죽 소리에

쿵쿵 뛰는 심장 소리에

달라스가,

붉게 물이 들고 있다

단풍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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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칼럼
영화 칼럼니스트 박재관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세계 클리오 광고제/칸느 광고영화제 수상
-오리콤 광고대행사 부서장 및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임
-알라바마 주립대학/캔사스 주립대학 교환교수
-경주대학교 방송언론광고학과 교수 및 부총장 역임

푸드 칼럼니스트 달맘 (송민경)

한•중•양식 조리기능사 / 식품영양학 학사
영양사 면허 / 영양교육 석사 /
초•중•고 영양교사 자격

수필 칼럼니스트

소설가 김수자

미주 작가 박혜자

시인,수필가 김미희

사모 시인/ 달라스 문학회원 김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