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교리의 수호자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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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Kim의 재미있는 교회사 이야기  

 

지금이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며 또한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신다는 ‘삼위일체’ 교리가 당연히 정통교리로 인정받고 있고, 이를 부인한다면 이단으로 판단하지만, 초대 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기 까지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의 세월이 걸렸다.
먼저는 인간의 이성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교리를 완벽하게 이해해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개념이고, 다음으로는 성경에서는 명확한 ‘삼위일체’ 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이 삼위일체가 사실이 아니거나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아버지(요 6:27, 롬1:7, 벧전1:2), 예수님(요1:1· 14, 골2:9, 히1:8, 요일5:20), 성령님   (행5:3-4, 고전3:16)을 모두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세 위격들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근거가 있다.
또한 삼위일체 내에서는 종속관계도 나타난다.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신다(신6:4, 고전8:4, 갈3:20, 딤전2:5).
분명히 인간의 이성적 논리에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인간의 한게 속에서 삼위일체를 완전히 정의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무한하고 완전하신 본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의 이성적 한계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시며 무궁무진하신 완전하심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헤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미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로마서 11:33-34).”
초대교회 당시인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와 그 도시의 장로 중 하나인 아리우스는 이 교리를 놓고 처음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 (아리우스파)는 아버지 하나님의 유일신론을 주장하며, 말씀이신 예수님이 성육신 이전에 존재하시기는 했지만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창조되기 전에 먼저 말씀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었다고 주장했다.
얼핏 생각하면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해 볼 때 아리우스파의 주장이 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성자 예수님도 하나님이셨다는 성경의 분명한 근거를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마치 유일신론과 예수님의 신성이라는 어느 하나를 주장하려면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것처럼 느껴지는 교리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알렉산더 감독은 자신의 권위와 책임에 입각하여 아리우스파를 정죄하고, 그들을 모든 직분에서 축출했다. 하지만 이 논쟁은 이로써 본격화하게 됐다. 아리우스는 이에 수긍하지 않고 로마제국의 동방의 여러 감독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콘스탄틴 대제는 교리분쟁을 직접 중재하기 위해 최초의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서방의 감독들로부터 동방의 감독들에 이르기까지 약 300여명이 참석한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아리우스를 대신하여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했으나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이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분노를 일으키게 됐다.
그 때 작성된 최초의 신경(信經)이 바로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이다. 이로서 삼위일체 교리의 분쟁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당시 사용된 단어인 성자와 성부의 동일신성(同一神性)이라는 단어 문제로 다시 분쟁이 시작됐다. 왜냐하면 서두에 설명한 대로 마치 이는 성부와 성자의 위격의 차이점과 종속관계의 문제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성적 논리의 한계 때문에 초대교회는 정통교리인 삼위일체를 확립하기까지 많은 분쟁과 고난의 세월이 있었고, 이 한 가운데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있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나일강 유역 출신으로 청년시절 사막의 수도사들로부터 엄격한 규율을 배우고 자라 친구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의 비서 출신으로 그가 죽자 후임으로 추대됐다.
콘스탄틴 대제는 말년에 아리우스파의 대표 감독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이후의 로마 황제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과 편의에 따라 아리우스파를 옹호하기도 했따. 이로 인해 아타나시우스는 유배 당히기도 하고 복귀하기는 것을 반복하며 오랜 기간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는 복귀했을 때 아리우스파를 반박하는 몇 편의 논문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타나시우스는 동일본질이라는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유사본질(類似本質)’ 이라는 표현을 수용했다.
이 때 삼위일체 교리를 나타내는 유명한 찬송이 암브로스에 의해 작곡되었는데 바로 ‘찬란한 주의 영광은(찬송가 130장)’이다.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제2차 보편공의회(381년)에서는 이러한 이해의 기반 아래 니케아 공의회의 결론인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하고, 정통교리로 비준하여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아타나시우스의 오랜 고난과 노력을 통해 비로소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확립한 교리의 최종적인 승리를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다니엘 김
한국정부 국책금융기관 여신심사 및 신용평가역
Financial Consultant
LA 소재 한국정부 투자금융관 역임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 석사
현 플라워마운드 교회 전도·선교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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