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행위냐, 믿음의 행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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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Kim 의 신앙칼럼  

 

기독교 중요 교리 중의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교리에 대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될뿐더러 실은 그렇기에 말씀대로 살고 있지 못하지 않나 싶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이신칭의’ 교리로 인해 행위의 자유함을 얻었다는 생각이 크게 앞선다. 마치 우리가 은혜 가운데 있으니 더 이상 행위로 인한 율법의 정죄 당함이 없다고 생각해 융통성 있게 살아도 되는 것처럼 여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분명히 착각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 6:15)”에서 단언한다.
인간은 자기가 순종하는 대상의 종이 되는데 죄에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고, 의에 순종하면 의의 종이 된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에 대한 대가로 죄사함을 받은 은혜 아래 사는 우리는 더 이상 옛 자아로 돌아가 죄의 종이 되어 살 수는 없다.
물론 아직 죄의 세력과 이 땅에서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유혹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생명의 성령이 제공하는 놀라운 은헤의 무기를 제공받고 있기에 우리는 승리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만약 죄에 굴복한다면 여전히 그는 율법의 정죄 아래 사는 자가 된다. 사노라면 육신의 연약함으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바로 죄의 찔림을 받고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느냐 아니면 마음이 무디고 강퍅하여져 그 자리에 머무르냐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에 이르러 구원받는다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에 대해 간과한 오류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정반대의 경우다.
실제로 신앙생활 하다 보면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이 실수하거나 잘못하였을 경우 지나치게 엄격하여서 심판의 잣대를 대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실수나 죄에 대해 엄격하여서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구원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위에 두 가지 예 중에서 첫번째 경우는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여 자기 의에 빠지는 초대 교회 유대인들과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고, 두 번째의 예는 이와는 관계없이 이신칭의 교리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해 죄책감에 빠진 경우라 할 수 있다.
성도들의 많은 사연을 보면 대체로 위의 세 가지의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세상 지식이 많고 적고, 부가 많고 적음의 문제에 관계없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진중함을 싫어하는 이 시대의 세태에도 불구하고 바른 교리에 대해 가르치고 공부할 필요를 더욱 느끼게 된다. 알아야 실천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아브라함의 여러 죄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세기 15:6)”고 하셨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다윗도 그랬다. “하늘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
아브라함도 다윗도 하나님 앞에 이미 택함을 받아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음에도 여러 차례 죄와 실수를 범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죄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올 때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셨다. 그런데 성경에서 마치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야고보서 2:14-24).”
마치 이 내용만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부족하니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처럼 이신칭의 교리를 수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행위를 구별해야 한다. 율법의 행위를 했다고 구원받지는 않지만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믿음의 행위, 순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두고 바울도 말하고 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로마서 1:5)”,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나니(로마서6:22).”
바라기는 오늘도 바울이 말하는 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인 ‘믿음의 행위’, 말씀의 순종 속에 사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다니엘 김
한국정부 국책금융기관 여신심사 및 신용평가역
Financial Consultant
LA 소재 한국정부 투자금융관 역임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 석사
현 플라워마운드 교회 전도·선교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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