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대부흥 운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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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영 목사의 ‘부흥을 사모하며’ 

 

평양 부흥운동은 우리 민족이 가장 암울한 시기에 일어났다. 이는 한국 교회의 체질을 복음주의 기독교로 개선시켰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와 민족을 갱생시키고, 일본 제국주의 치하 36년을 이길 소망을 주었다.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평안남도 남자 연합 사경회’가 열렸다. 낮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1,000명만 참석할 수 있었고, 밤에는 평양 시내 교인들의 참석도 허락됐다.
여자들은 자리가 없어서 다른 예배당 네 군데에 모여 선교사 아내들이 인도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1월 13일까지도 성령님 강력한 임재 없이 냉랭하게 모임이 끝났다. 선교사들은 다음날 14일 정오  기도회를 가지면서 영적 부흥 없이 사경회가 끝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그날 밤이었다. 길선주 장로가 회중 앞에 나와 친구가 1년 전 세상을 떠나면서 돈 계산을 잘 못하는 아내 대신 재산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당시 100달러 상당의 돈을 사취했던 사실을 눈물을 흘리며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친구 아내에게 돌려주겠다고도 말했다.

그러한 고백이 있은 직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강하게 임재하셨다. 그날 밤예배가 끝난 후에 600명 가량이 남아서 밤이 맞도록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신들의 모든 좌를 솔직하게 토로하고 고백했다.

현장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지금까지 미국의 제1차, 2차, 3차 대각성 운동과 웨일즈의 부흥운동, 인도의 부흥운동에 대해서 읽고 들었지만 이렇게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처음이었다고 기록했다.
블레어 선교사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들을 그날 밤에 공개적으로 고백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 심판의 밝은 빛 앞에선 죄 지은 영혼들을 보시듯 그들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죄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그 죄악을 청산했습니다. 다음날 길거리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으며, 도둑 맞은 물건과 돈이 되돌아왔고 오랫동안 갚지 않았던 빚이 청산됐으며 그 결과 전 시가지가 술렁거렸다”라고 기록했다.

스왈른 선교사는 “성령께서 임하시니 우리 선교사들이 반년 동안 해온 일보다 더 큰 일을 성령님께서 반날 동안에 완성해주셨고 두 달 동안 2,000명 이상이 회심하게 됐다”고 전했다.

전국으로 확산되는 부흥의 불길

1월 14-15일 양일간에 장대현 교회에서 놀랍게 임하신 성령의 역사는 네 곳에 분산되어 예배 드리던 여성도들 모임에도 나타났다. 1월 19일 밤에 강력하게 임하셨고 21일과 22일에도 강하게 임하심으로 여성들에게도 부흥의 불길이 확산되었다.

부흥의 불길은 평양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인 남산현 교회에도 임하여 장대현 교회의 부흥이 그대로 재현됐으며, 이 부흥의 불길은 교단을 초월하여 평양 전역으로 확산됐다.
부흥의 불길은 젊은이들로 옮겨져 평양신학교와 숭실대학과 숭덕학교에도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 온갖 죄악들을 다 토해내었다. 서로 잘못을 고백하느라 수업이 중단되기도 했고, 학생들의 경건생활과 수업태도도 달라졌다.

16일 정오 선교사 기도회에는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참석했다. 두 시간 동안이나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 속에서 자신들의 잘못과 죄악을 철저히 회개했다.
부흥의 영으로 충만해진 선교사들은 전국 주요도시들로 찾아가 순회부흥회를 인도함으로 평양에서 있었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선교사들과 길선주 목사에 의해 한 달도 못 되어 서울, 선천, 광주, 청주, 대구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만주 지역에도 조선에서 일어난 대부흥의 소식이 들렸다. 그들 역시 부흥이 임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1907년에 카나다 장로교회 소속 중국 주재 선교사인 조나단 고포드가 평양 부흥의 현장을 방문하고 돌아가 만주에 평양 대부흥의 소식을 전함으로 평양의 부흥은 만주와 중국의 부흥으로 확산된다.

 평양 대부흥 운동의 영향과 결과

평양 부흥운동은 사경회 기간에 일어난 말씀에 토대를 둔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가장 건전한 부흥의 모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적각성운동이 사회개혁으로 열매를 맺었다.
교육열이 향상되어 이후 수많은 학교들이 세워졌다. 교회의 신앙 수준이 높아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회자 소명을 받게 되었다.
수천명이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성경공부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놀음, 간음, 일부다처, 조상숭배와 우상숭배의 관습이 없어졌으며 금주, 금연운동이 일어났다. 기생과 환락의 도시, 한국의 소돔 고모라로 불리웠던 평양은 거룩한 도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양반과 상놈의 신분타파가 이뤄졌다. 성경적 죄에 대한 개념이 확실해졌고 도덕성이 회복되었다.

1885년 선교사들이 조선에 공식 입국한 후 20년이 지난 1905년 교인수가 약 5만명이 됐다. 그런데 1907년에만 3만명이 회심했고, 1909년에는 약 20만명으로 증가했다.
부흥운동의 결과 한국인과 선교사들, 장로교와 감리교, 양반과 천민 모두 연합해 성서공회를 세우고, 성경 번역에 힘썼으며, 숭실대학, 연희 전문 대학 등 교육기관을 세웠다. YMCA 등 연합활동도 활발히 일어났다.

한국 교회의 부흥소식이 선교 보고지를 통해 많은 세계에 알려졌고, 그로 인해 세계적인 부흥사들이 한국에 많이 와서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했다.
이기풍을 제주도로, 최관흘을 블라디보스톡으로, 일본, 만주, 중국 등지로 선교사를 파송 함으로 한국교회가 초기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탈바꿈했다.
무엇보다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인해 일제 36년의 고난과 박해를 이길 수 있는 영적 힘을 얻게 됐다.
주님, 평양 주재 선교사님들의 정오기도회 같은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회가 오늘날 곳곳에서 시작되게 하소서. 그 결과 20세기 초반에 일어났던 세계 곳곳에 일어났던 대 부흥이 오늘날도 일어나게 하옵소서.

* 평양 대부흥 운동은 박용규 교수님의
 ‘평양 대부흥 이야기’에서 대부분 인용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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