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아편, 장로는 악독한 놈…북한에는 종교정보 하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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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 탈북 물리학자 조셉 한 교수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탈북 물리학자 조셉 한 교수는 인민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 대학교 2년 다니고 교원으로 근무하던 1999년 2월 탈북했다. 4년 동안 중국에서 지내다 2003년 1월 서울에 정착해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탈북자 최초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 온 뒤 텍사스 A&M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레이저 증폭에 대해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를 통해 북한 땅과 탈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야기를 들어보자.

◈ 핵물리학을 전공한 이유는?
북한은 미국이 남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해 1950년 북침했고, 아직도 그 야욕을 버리지 않고 우리를 노예로 삼고자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우리는 조국을 지키고 미제를 몰아내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해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배웠다.
한국에서는 공부 잘하면 의대나 법대에 많이 가던데 북한에서는 공부 가장 잘하는 학생들은 물리학을 전공해 핵무기 개발에 기여하고 싶어한다. 청진 제일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북한의 카이스트’라고 불리는 과학원에 입학했다.  

◈ 왜 탈북을 결심했는지?   
과학원에 들어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구호에 맞춰 식당으로 갔다. 반드시 김일성 초상화 배지를 달고 가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조직생활을 해야 하지만 쉽지 않았고, 그 와중에 북한에 식량난이 찾아왔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비록 졸업은 못했지만 경시대회 입상 경력도 많고, 컴퓨터 코딩경기에서 1등을 하는 등 지역에서는 좀 알려졌었다. 특채로 교사가 됐는데 월급을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집에 있던 물건과 아빠가 입던 옷 등을 가져가 장사를 하게 됐는데, 학교에서 젊은 사람이 일은 하지 않고 장마당만 다닌다고 뭐라고 했다. 더이상은 안되겠다 싶어 1999년 2월 추운 겨울 밤 탈북을 결심했다. 중국에 가서 과외라도 가르칠 생각으로 책 몇 권을 챙겼다.  

◈ 중국에는 어떻게 갔는가?  
북한 2월은 엄청 춥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걸어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늘 신기해 ‘절대적 존재가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강을 건너면서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면 경비대에 걸리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 북한에서부터 예수를 믿었나?   
20년 동안 살았지만 교회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산타 클로스도, 크리스마스도 들어보지 못했다.
북한에서 “종교는 아편이고, 종교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으니까 믿으면 안 된다”고 배웠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아무 종교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한국에 오니 교회에 안 가도 아담이나 예수 같은 인물은 다 알더라. 북한에서 들은 기독교는 미국인 선교사가 배고파 사과를 훔친 아이를 채찍으로 때리는 이미지로, 장로는 악독한 놈으로 묘사되는 것이 전부였다. 평양에 ‘봉수교회’란 곳이 있다는 것도 한국에 와서 알았다.

◈ 중국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
무사히 중국에 도착했더니 한 한족 집에서 나무일을 소개해줘 중국만두 하나, 큰 도끼 하나 갖고 5km를 걸어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가져왔다.
들키면 안 되니까 밝기 전에 나갔다가 어두워져서야 들어왔다. 그곳에 가면 나무하러 온 탈북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쉬는 시간 남들 담배 필 동안 방정식을 풀었다. 과외라도 하겠다는 것은 망상이었다. 북한의 학문적 수준이 너무 낮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그곳이 중국에서도 너무 시골이라 사람들은 물리학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중국에서 탈북자는 부모도, 형제도, 나라도 지켜주지 못한 존재로, 일 해도 돈도 받지 못하는 등 동물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됐는가?  
얼마 후 조선족 동포들이 운영하는 토끼 사육장에서 일하게 됐다. 거기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이상해보였다.
나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했는데, 종교는 아편이라고 세뇌돼서 기독교를 믿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지내며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책도 읽어보고, 찬송가도 흥얼거리며 일하던 중 사육장 사돈의 삼촌이 “예수 믿으라”며 성경책도 주고 신발도 줬다.
사도신경, 주기도문도 가르쳐주고 예수 잘 믿으면 미국 선교사님이 미국에도 데려다준다고 했다. 그때 받은 성경을 읽다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다.

◈ 예수 믿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다 도망가서 사육장에서 혼자서 일하게 됐다. 외로우면 기도하고 찬양도 흥얼흥얼 했는데, 두려움이 가셔지고 평안함이 오고 기분이 좋아졌다.
제일 좋아하는 찬양이 ‘예수 사랑하심은’인데, 찬송가 부르다가 나를 사랑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 하나님 보내주셔서 함께 해 주신 것이 감사해서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당시 기도제목은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게 해주세요’ 였다.  

◈ 성경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나?   
성경이 재미있긴 한데, 어떤 부분은 너무 난해했다. 주님이 기도를 들어주셔서 토끼장에서 나와 2000년 12월부터 성경통독반에서 공부하게 됐다.
10대부터 3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성경을 다독하며 하나님을 알아갔다. 성경통독반 리더가 되어 20여 지체와 함께 웃고, 울고, 다투고, 공동체를 섬기는 법을 배웠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오신 선교사님, 목사님들 통해서 성경의 의미를 배우며 2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경만 보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약 20번, 신약은 100번을 읽었다. 300번 이상 읽은 사람들도 많았다.

◈ 어떻게 한국에 가게 됐는지?  
2002년 4월 갑자기 공안이 들이닥쳐 전원 체포됐다. 수갑을 찬 채로 도망쳐서 겨우 살아남았다. 1달러 25센트 갖고 윈난성까지 갔는데, 위기일발의 순간 하나님께서 대답할 바를 알려주셔서 위기를 모면하고 미얀마 국경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카친족 침례교 목사님을 만나 짧은 영어로 “저는 탈북자입니다. 양곤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가고 싶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했더니 선교사님 통해서 길을 만들어 주셨다.
하나님 은혜로 한국에 도착했고, 연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탈북자 최초로 전액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 와서 201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후에 요셉이 가족을 구한 것처럼 어머니와 누나, 형을 구하게 됐다.   
김지혜 기자 ©  K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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