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복음화 운동 백만인 구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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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영 목사의 ‘부흥을 사모하며’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에 이어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백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났다. 

 

백만인 구령운동 배경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후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1907년에는 고종황제까지 퇴위시켰다. 이제 조선을 도울 이는 하늘 밖에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 민족이 사는 길이 기독교에 있다고 확신한 이들은 민족 복음화를 염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백만인 구령운동이 시작되었다.

1909년 여름 송도에 주재하는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이 민족과 한국교회를 살릴 원동력은 영적 각성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영적 각성을 위해 7월 12일부터 일주간 기도회를 가졌다. 

이후 9월에 열린 감리교 선교연회에서 스톡스, 갬불, 리드 등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이 나라에 다시 성령의 계절, 그리스도의 계절이 와야한다”며 20만명의 영혼을 올해에 구원하자는 제안을 했다. 

남감리교 선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20만 영혼을 그리스도께’구호를 정하고 민족 복음화 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의한다. 

이어 10월 8일과 9일에 열렸던 복음주의 연합공의회는 남감리교의 20만 구령운동을 받아들여 다시 ‘100만 영혼을 그리스도께’라고 확장한 전도운동을 결정하고 이 운동을 1910년 10월 9일까지 1년간 매진하기로 정했다.

이 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선교사 게일을 위원장으로, 언더우드와 밀러와 벙커를 위원으로 위촉했다. 각 교단에서는 특별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초교파적인 대규모 전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 인구를 14만에서 20만명 정도로 추산했는데, 100만명 구령운동은 목표달성이 쉽지 않은 전도운동이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의 전개와 실천

백만인 구령운동을 통한 민족 복음화를 위해 당시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의 지도하에 특별기도, 전도집회, 축호전도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총력 매진했다.

1. 특별기도회: 이길함 선교사를 이어 평양 장대현교회의 담임이 된 길선주 목사는 민족 복음화 운동을 위해 같은 교회 박치록 장로와 함께 조용히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새벽기도회를 한다는 광고가 나가자 매일 600명에서 700명씩 모였다. 

사경회와 전도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급속히 한국교회에 확산됐다. 이 기간에 또 민족 복음화를 위한 금요 심야 기도회가 시작, 정착됐다. 

어떤 교회들은 주일 준비를 위해 토요일에 모여 기도회를 가진 후 두 명씩 짝지어 마을로 들어가 전도한 후 주일에 사람들을 교회 예배에 초청했다. 

 

2. 대중 전도집회: 평양과 서울을 비롯해 전국 여러 지역에서 전도집회가 열렸다. 이 무렵 외국의 수많은 부흥사들이 입국해 이 운동에 동참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월버 채프만 목사, 찰스 알렉산더 목사 부부, 로버트 학스니, 데이비스와 그의 어머니, 놀튼 부부, 뉴욕대학의 총장 헬리 맥크레큰, 아더 피어선박사, 볼티모어 여자대학의 총장 가우쳐 박사 등이 그들이었다. 

한국인 목사 가운데서는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가 강사로 많이 활동했다. 전도집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결신했는데,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렸던 3주간의 전도집회에서는 700명이 결신했고, 평양 남산현 감리교회에서는 한주만에 100명이 결신했다.

 

3. 날 연보(Day Offering)를 통한 축호전도와 전도지 나눠주기: 백만인 구령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독특한 전도방법은 날 연보를 통해 엄청난 양의 전도지와 마가복음서를 배포한 일이었다. 

‘날 연보‘란 전도운동을 위하여 물질 연보와는 별개로 자신의 시간을 연보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신자들 간에 큰 호응을 얻어 평양에서만 1,000명의 신자가 22,000날을 연보했고, 황해도 재령에서는 1만날을 연보했다. 

이렇게 연보 된 날이 전국적으로 10만 날이 넘었다고 한다.  이런 날 연보에 대해 선교사들은 영문 월간지 ‘The Korea Mission Field’에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고되고 가난한 생활을 하는 한국 사람들은 도합 10만 날을 전도운동에 바쳤다. 지난 겨울에 사용한 일 수는 7만 6,000날이고 금년 가을에도 수백명의 전도인들이 가가호호 심방하는 활동과 대집회에 출석한 구도자들과 개인적 접촉을 위해 한 달을 온통 바쳤다. 300만장의 전도지를 나눠줬고, 신자들이 돈을 내고 70만권의 마가복음을 구입해 불신 동포들에게 무료로 배부하면서 복음서를 읽고 예수를 믿으라는 간곡한 권고와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한국인 가정 치고 심방 받지 아니한 가정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심방의 결과를 얻기 위해 수 천명의 한국인들이 매일 기도를 올리고 있다.”

 

4. 제1차 YMCA 학생사경회: 백만인 구령운동 기간에 열렸던 많은 집회들 가운데 하나가 민족복음화의 열정이 가장 뜨겁게 불타고 있던 젊은 대학생들을 위한 YMCA 학생 사경회였다. 

1910년 6월 22일에서 27일 기간에 서울 북부에 위치한 오래된 사찰인 진관사에서 열렸는데, 언더우드, 이상재, 김규식, 길선주, 에비슨, 왓슨 등 지도적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이 강사로 나서서 젊은 대학생들에게 민족에 대한 소망과 환상을 불어넣어 주었다. 

일재의 침략 앞에 종교들도 연합한 것이다. 스님들은 학생들을 위해 자신들의 방을 양보했고 염불과 목탁소리 대신 찬송과 기도소리가 절에서 올려졌다.

비록 10개 대학을 대표하는 46명의 학생들이 참석한 소규모의 사경회였지만, 한일합방으로 인해 국가의 주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탁월한 학생들을 훈련시켜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로 만들려는 소중한 집회였다.

 

백만인 구령운동 결산

곽안련 선교사는 “산골짝 깊은 곳이라 할지라도 복음과 접촉해보지 않은 마을은 거의 없었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교회들이 연대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또 민족의 역사 이래 가장 어려운 위기상황에서 민족의 에너지를 한데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국가적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을 던져주며 “기독교가 민족의 희망”이라는 말이 퍼지게 됐다.

 

* 백만인 구령운동의 기사자료는 대부분 박용규 교수의 ‘평양 대부흥 이야기’에서 얻고 인용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전 JAMA 대표 강순영 목사

청교도 이주 400주년 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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