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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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길 목사의 신앙칼럼 

 

사도행전 9장을 보면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가던 사울(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사울의 눈을 잠깐 동안 멀게 하셨다.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일어난다. 왜 하필 눈이었을까? 혼내시기 위한 거였다면 다리를 부러뜨릴 수도 있었고, 문둥병에 걸리게 할 수도 있었을텐데 예수님은 굳이 앞을 못 보게 하는 방법을 택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3가지의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첫번째 이유는 자신의 시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람에게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보는 행위를 통해 대부분의 정보를 습득한다. 그런데 눈을 통해 습득된 정보는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해석된다. 

보여지는 것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경험과 지식이라는 렌즈를 통해 해석되어 우리 안에 받아들여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울 역시 유대인의 전통과 율법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봤다. 그런 시각에서 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한 지상 최대의 사기꾼일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의 전통을 조롱하고 위대한 모세의 율법을 마음대로 해석해서 백성들을 미혹하는 악당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울의 경험과 시각에서 예수님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였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울의 눈을 멀게 만든 첫 번째 이유였다. 예수님은 사울의 눈을 가림으로써 사울의 눈을 가리고 있던 기존의 생각들과 전통, 가치관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인 예수님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원하셨던 것이다.   

이어서 사울의 눈을 멀게 한 두번째 이유는 사울이 살아갈 새로운 삶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사도행전 8장 8절을 보면 눈이 먼 사울이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다고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사울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장면이다. 사울이 누구인가. 이스라엘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자 로마 시민권자에, 당대 최고의 학자를 스승으로 둔 사람이었다. 어딜 가도 인정받고 칭찬받고 높임을 받던 사람이었다. 

사울은 항상 다른 이들 앞에 서고 이끄는 사람들이었지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앞을 보지 못해 ‘누군가의 손을 의지해서 끌려 다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얼마나 비참했겠는가. 이것은 사울의 인생이 순식간에 뒤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앞으로 펼쳐질 사울의 선교 여행을 위해 예수님께서 그를 준비시키는 과정이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선교지에 가서 다양한 문화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 할 사울이 어떤 상황에도 적응할 수 있도록 그를 준비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사울은 낮아져야만 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된다. 때로는 자존심도 버려야 하고 상대방 비위도 맞춰야 되고 복음을 위해 모든 수모를 참아야 하는데 예전 사울의 모습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사울을 낮추셨고 그에 걸맞게 준비시키셨다. 이것이 사울의 눈을 멀게 하신 두번째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앞을 보지 못하게 한 세번째 이유는 진리에 대해 고민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9절을 보면 사울이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고 나온다. 이 장면은 사울의 번민과 고뇌, 그의 복잡한 심경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울은 지금 엄청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쟁이들을 죽이는 게 목표였던 사람이 진짜 예수를 만났으니 어떻게 충격을 안 받을 수가 있겠나. 

사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내가 만난 예수를 정말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였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처럼 사울이 길에서 예수님을 보자 마자 그 자리에서 “아멘” 하고 믿은 게 아니었다. 

예수님이 던지신 질문 “니가 알던 진리가 정말 참된 진리냐?” 앞에서 자신이 그동안 쌓았던 모든 걸 버리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한 사도 바울의 치열한 고민이 이 한절에 담겨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대한 우리의 자세도 이래야 한다. 사도행전 17장 11절은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상고하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아나크리노’인데, 이 단어는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조사하다”란 뜻을 지니고 있다. 

동일하게 우리들도 우리가 믿는 신앙에 대해, 믿음에 대해, 말씀에 대해 상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맹목적인 신앙은 좋지 않다. 맹목적인 믿음은 바보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낼 뿐이다. 특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눈이 먼 순간, 사울은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에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의 새로운 인생길을 준비하고 계셨다. 

우리도 앞이 보이지 않으면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막막해진다. 당황하게 된다. 바로 그때가 영의 눈이 떠져야 할 시기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눈을 가리우실 때 기도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경험과 편견의 비늘들을 벗겨 달라고, 영의 눈을 여시사 주의 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비늘은 내가 벗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벗겨질 수 있다.

 

김명길 목사

SMU 퍼킨스 신학대학원

(Th. M) 재학 중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 대학원

목회학 박사(D. Min.) 수료

감리교 신학대학교 목회학 석사

건국대학교 히브리학과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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