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래함과 근대 복음주의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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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그래함 목사
빌리 그래함 목사

강순영 목사의 ‘부흥을 사모하며’ 

 

빌리 그래함은 평생 높은 도덕성과 순수함을 지키면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전도자였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185개 나라 2억명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라디오와 TV, 영화와 책을 통해 그의 설교와 복음을 들은 사람이 약 22억에 달할 것이라는 통계도 있을 만큼 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인류에게 복음을 전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

 

젊은 시절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은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샤롯이란 작은 도시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성경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어려서 말을 더듬어서 이를 고치기 위해 뒷산에 올라가 나무들을 대상으로 웅변을 연습하곤 했다.        

18세에는 가정주부들에게 가정용품들을 판매했는데 특유의 재담과 뛰어난 영업전술을 가졌던 그는 고객들에게 제품을 일단 사용하게 한 다음 그 경험담을 다른 고객과 나누는 방법, 즉 간증을 통해서 많은 실적을 올렸다.

그가 16세 때 ‘모디카이 햄‘이 샤롯에 부흥사로 초청됐다. 그래함의 아버지는 마을 크리스천들을 집으로 초청해 부흥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를 구하는 중보기도 모임을 가졌다. 

이 기도의 응답과 축복이 그 가정에 임해 모디카이 햄의 집회 기간에 빌리 그래함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로 결단한다.

1940년 빌리 그래함은 플로리다 성경대학(현, Trinity College)을 졸업하고 남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1943년에는 시카고 인근의 휘튼 대학(Wheaton College)에서 인류학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 후 같은 해 중국 의료선교사의 딸이자 대학 찬구였던 ‘루스 맥큐 벨’(Ruth McCue Bell)과 결혼했다. 

부인 루스 벨은 6년동안 평양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서 공부했다. 당시 평양 외국인 학교는 동남아 일대에서 시설도 좋고 잘 알려진 우수한 학교였기에 아시아 선교사 자녀들이 많이 입학했다고 한다. 

2년간 침례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45-1950년 기간에는 Young For Christ(십대 선교회)의 전임사역자가 되어 순회 부흥사로 미국과 영국의 여러 도시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한다. 

 

하나님 앞에서 전도자로서 중대한 결단을 하다

 

1949년 빌리 그래함은 헐리우드 장로교회 여성사역이자 당시 유명했던 헨리에타 미어즈가 인도하는 포레스트홈 대학생 모임에 강사로 왔다. 

그는 이 기간에 CCC 설립자 빌 브라이트와도 친분을 맺는다. 여하튼 헨리에타 미어즈와 전국적인 부흥운동에 대해 깊은 대화들을 나눈 후, 그즈음 밤에 무릎을 꿇은 채로 이렇게 기도한다.

“성경이 이해할 수 없고 모순처럼 보이는 곳도 많지만 이 말씀을 당신의 말씀으로, 당신의 영감으로 된 말씀으로 믿겠습니다.” 

그 후 그의 설교는 “성경은 말하기를…”, “성경은 말합니다…”라고 외침으로 가득하게 된다. 

 

LA 전도대회, 런던 전도대회, 뉴욕 전도대회 통해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로

1949년 그의 나이 31세, 9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빌리 그래함의 LA 천막집회가 열렸다. 원래 3주로 예정됐으나 집회 도중 8주로 연장됐고, 8주 동안 35만명이 참석해 3,000여명이 결신했다. 

당시 서부지역 인기 라디오쇼 진행자인 스튜어드 햄블린이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간증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 언론을 장악하고 있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자신의 모든 언론사 편집부장에게 빌리 그래함을 집중 보도하도록 지시함으로 수많은 신문과 방송이 그를 주목했다. 이제 빌리 그래함은 명실상부 미국을 대표하는 젊은 부흥사로 부상하게 된다.

1950년에는 전도대회 기획과 재정관리를 위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BGEA)‘를 조직했고, ‘결단의 시간’ 이라는 라디오 전도방송을 직접 인도하면서 750개 방송국을 통해 전 미국을 향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954년 3월 런던 대회에서는 200만명 이상이 참석하고 3만 8,000명이 결신했다. 1955년 스코틀랜드 집회에서는 연인원 265만명 참석, 5만 2,000명이 결신함으로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1955년에는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를 대변하는 잡지 ‘Christianity Today’를 창간한다.

1957년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6주간 열렸던 전도집회에서는 240만명이 모였고, 6만 1,000명 이상이 결신함으로 빌리 그래함은 미 전역을 대표하는 부흥사로 미국과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이 역사적인 전도집회에서 빌리 그래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고 수많은 뉴욕 시민들은 그의 메시지에 놀랍게 반응했다.

 

전 세계로, 공산권으로

1958년 샌프란시스코 전도대회부터는 복음전도학교를 시작해 대회 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훈련을 실시했다. 그의 전도집회는 호주, 뉴질랜드, 유럽, 아프리카, 공산권 나라들인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폴란드, 소련, 동독, 체코, 루마니아, 중국에서까지 열렸다.

빌리 그래함은 평생 185개국을 순회하면서 모여온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라디오와 영화와 책과 TV를 통해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다가 2005년 뉴욕집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한국에도 1952년, 1973년, 1984년 세 차례 방문했다. 특히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5일동안 열렸던 전도대회는 빌리 그래함이 잊지못할 기록적인 집회가 되었다. 

7월 3일에는 110만 명이 한자리에 모였고 5일간 325만명이 모여 3만 5,000명의 결신자가 나왔다. 

‘빌리 그래함의 여의도 전도 대회’와 CCC가 주관했던 ‘엑스폴로 74 민족 복음화 대회’는 한국 복음화에 폭발을 가져다주는 대회가 되었다. 

부인 루스 그래함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1992년과 1994년 평양에 두 차례 방문해 김일성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전달했다. 

또한 빌리 그래함은 미국 대통령들의 멘토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먼 대통령부터 아이젠하워, 닉슨 등 무려 12명의 대통령에게 멘토가 됐고, 6명의 대통령 취임식에 기도를 했다. 전쟁을 비롯한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대통령들은 그와 상의하고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JAMA 대표 강순영 목사

청교도 이주 400주년 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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