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알리고 기독교 변증하는 것이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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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석 목사가 CTS TV ‘4인 4색’에 출연해 ‘이슬람 바로 알기’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방송화면 캡쳐.
이만석 목사가 CTS TV ‘4인 4색’에 출연해 ‘이슬람 바로 알기’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방송화면 캡쳐.

특별 인터뷰 | 한국 이란인 교회 이만석 목사 <1> 

 

다인종 사회인 DFW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이슬람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 이란인 교회 담임이자,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이슬람 전문위원, 한국 교회연합 이슬람 대책 연구원장, 무슬림 선교 훈련원장을 맡고 있는 이만석 목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 이란을 선교지로 정한 이유는? 

1986년 이란에 가서 2004년 말에 떠났다. 이란을 떠나와서는 이슬람학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이란인 교회 목회를 하고 있다. 

이란을 놓고 특별히 기도한 것도 아니다. 한국에 있을 때 대우그룹에 근무하며 대우센터 신우회를 만들어 열심히, 즐겁게 활동했다. 

이후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전도사 생활을 하던 중, 이란에서 일하던 신우회 동료들이 건설현장에서 신앙생활 하는데 좀 도와달라고 불러서 가게 됐다. 

대우 소속으로 일하며 한인 근로자들과 신앙생활을 했다.

 

◈ 이란에서의 신앙생활은 어떠했나?

그곳에 가보니 한인 근로자가 600명, 현지 근로자가 한 600명 됐다.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이란어를 배웠는데, 현장에서 이란어를 제일 잘한다는 소문이 났다. 회사에서는 이란어를 잘하니 이란인 노무 관리자를 맡겼다. 

근로자들의 휴가관리, 급여관리, 후생관리를 담당하면서 이란인 근로자들이 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교회에 나왔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싶어서 한국어와 이란어로 동시에 설교를 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세례 받는 사람들도 있다보니 “무슬림을 개종시킨다”는 신고가 이란 정부에 들어가서 이란 정부가 1차 추방을 명령했다. 이란에 간 지 4년차 때 일이었다.    

 

◈ 어떻게 다시 이란으로 갔는지? 

내가 있던 곳은 반다르 아바스였고 그 곳에서 1,200km떨어진 곳에 테헤란 한인교회가 있었다. 담임 목사님이 안 계실 때 초청해서 설교도 했는데 마침 그 곳 목사님께서 카자흐스탄으로 임지를 옮기셨다. 

내가 추방돼 한국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담임 목회자로 나를 초청한 것이다. 교인들이 힘쓰고 기도하면서 비자를 살려서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정부가 상사 주재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91년 다시 이란에 입국해 2004년 다시 추방되기 전까지 사역했다. 

 

◈ 기억에 남는 이란에서의 사역은? 

교회대항 체육대회를 만들어 한인교회 주최로 11개 이란교회가 함께 여러 가지 종목의 운동경기를 했다. 축구, 야구, 배드민턴, 테니스까지 하는데 두 달 동안 온 교회가 축제 분위기였다. 

또 또 이란 사람들이 찬양을 잘 못한다. 이슬람 율법에서 음악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음악을 안 가르친다. 호메이니가 선교사와 기독교인을 다 쫓아내면서 찬양할 사람이 더욱 없어졌다. 

기억에 남는 곡 몇개만 부르는데, 그나마도 정확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한국 복음성가를 이란어로 번역해 음반을 만들어 100곡 정도를 담아 CD로 제작해 이란교회에 전달했다. 

악보 보는 법, 악기 다루는 법을 가르쳐서 콘서트도 열었는데 2,000명씩 모였다. 그 인원이 다 들어갈 교회도 없어서 인원을 나눠 수용하며 긴 기간 콘서트를 진행했다. 

 

◈ 이슬람 국가에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한 계기가 있나? 

1990년에 이란인 목사 순교사건이 있었고, 1994년에는 이란인 목사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 연달아 세 분이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성회를 담임하던 목회자가 칼에 맞고, 복음교단의 한 목회자는 총에 맞았다. 

범인이 잡혔는데 하는 말이 “앞으로도 목회자 살해는 계속 일어날 것이다. 나는 지시를 받았지만 누가 지시했는지는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목회자라고 해봐야 총 12명이었다. 그 분들을 모아서 “피해가 심각할텐데 외국으로 피신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는데, 보두 “그럴 수 없다. 양떼를 버리고 가면 양떼가 어떻게 되겠느냐. 죽음이 무서워 도피한다면 그 사람들이 신앙을 어떻게 지키겠느냐”고 하셔서 그냥 머물게 됐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 앞에서도 “숨어 다니다 왔습니다” 하기 보다 “열심히 선교하다 왔습니다”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 그 때부터 작정하고 더 열심히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몰래 숨어서 만나 전도하던 것을 “복음 듣고 싶은 사람 다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렇게 이란 전역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 어쩌다가 다시 추방됐는가? 

신나게 사역을 하니 정부에서 제재가 들어왔다. 어느 날 갑자기 부르더니 한 달 내로 이란을 떠나라고 했다. 

테헤란 교회 성도들은 “종교 핍박이다, 동포를 무시하는 행위다, 외교적으로 문제를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조용히 나가는 것이 하나님 뜻 같았다. 

성도들에게 “지금은 나도 왜 떠나야 하는 지 모르지만 일단 감사하고 보면, 나중에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실 것”이라고 한 뒤 한 달 동안 감사기도만 하고 이란에서 떠났다.  

 

◈ 나중에 깨달은 하나님 뜻은?

이란 전역을 바쁘게 돌아다니다 한국에 와보니 시간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공부를 좀 더 할 생각으로 신학교에 진학했는데, 이슬람을 너무 미화시켜서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이슬람학으로 아세아 연합 신학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인디애나 주 그레이스 신학대학원에서 성경과 코란 비교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년 동안 이슬람 국가에 거주하며 얻은 경험과 학문을 통해 이슬람교를 알리고 기독교를 변증하라고 이란에서 내보내셨음을 깨닫게 됐다.

 

김지혜 기자 ©  K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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