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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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영렬 목사의 신앙칼럼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집회가 있습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학기 시작마다 진행되었던 개강 수련회입니다.

경기도 양수리 수양관에서 약 2,000명의 신학생이 일주일간 모여 진행되었던 수련회는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만 하는 필수코스였지만 그 때의 집회는 제게 큰 감동과 은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말씀을 전하신 강사들도 훌륭했지만, 특히 좋았던 것은 성찬식이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성찬을 받았습니다. 성찬식에 특별한 순서나 간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성찬식이었습니다. 

당시 총장이셨던 김의환 목사님이 집례하고 교수님들이 총동원되어 분병, 분잔위원으로 섬겼던 일상적인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고, 대부분의 신학생이 눈물로 떡과 잔을 받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아닌 성례전 자체를 통해 그렇게 은혜를 경험한 것은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더 놀라운 일이 제게 일어났습니다. 늦은 밤 은혜롭게 집회를 마쳤는데, 저는 더 기도하고 싶은 감동이 생겨서 기도실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씩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기도실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비전과 앞날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데, 갑자기 성령께서는 제가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동안 가정에서 아내에게 제가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알게 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시부모를 모시고 세 명의 시동생들까지 책임지게 해놨을 뿐 아니라,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아내를 홀로 지방에 남겨두고 주말부부 신학생으로 살면서도, 저는 언제나 아내에게 큰소리를 탕탕 쳤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이기적인 저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실에서 깊이 생각해보니 결혼하고 나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내에게 잘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미안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뒤로하고, 그때 저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빈 노트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들이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썼습니다. 가끔 아내의 생일이나 출산 때 “고맙다, 수고했다, 고생시켜 미안하다”는 말을 쓰기도 했지만, 그 때처럼 진실하게 썼던 때는 처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민감합니다. 자기 잘못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살면서 생기는 인간관계의 갈등을 모두 상대방의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가정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분쟁이 생기면 한쪽만 잘못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잘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 잘못은 모두 잊어버립니다. 

상대방의 잘못만 크게 보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으면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상대방의 잘못은 작게 보이고 나의 잘못이 크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남의 눈에 티를 빼내 주기 전에 네 눈에 들보를 빼내라고 했습니다(마7장). 들보란 집을 떠받치는 대들보를 말합니다. 티는 원어를 보면 마른 줄기나 잔가지를 말합니다. 짚이나 왕겨를 일컬을 때도 쓰입니다. 

들보란 당시 신전을 지을 때 쓰는 나무로서 기둥에 걸쳐져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나무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남의 작은 허물을 비판하기 전에 네게 있는 큰 죄와 허물을 먼저 발견하라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메마른 심령은 자기 잘못을 보지 못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를 할 때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눅18장).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 하지만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았던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인정한 기도는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바리새인은 겉으로 볼 때 세리보다 거룩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심각한 죄악의 대들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다고 하면서 상대적인 우월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한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죄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리는 남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죄인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죄악 됨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남을 비판하고 헐뜯기 전에 자신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 은혜의 시작은 자신의 죄악 됨이 보여지면서부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사람에게 서서히 뚜렷하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멸망 받을 심각한 죄인임을 알 때,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죽으신 십자가가 가치 있게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종교의 상징물이 아니라 나를 구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 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함부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죄인이었던 자신을 용서해주신 하나님께 그들의 죄도 용서해주시길 긍휼의 마음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보병으로 복무한 이래, 자신은 편하고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한테 이러니저러니 훈계하는 사람들을 대단히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자신이 직접 당하고 있지 않은 유혹들에 대해 여러 말 하기를 꺼리게 되었지요.” 계속해서 죄의 유혹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제 생각에 모든 죄의 유혹을 다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컨대 저는 기질상 도박의 충동을 느끼지 않습니다. 도박의 충동 같은 것으로 지나치게 나아가 버리거나 왜곡되게 표출될 수 있는 선한 충동 자체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루이스의 말대로 어떤 사람은 하루에 몇 번씩 넘어지며 고통받는 죄가 내게는 아무런 유혹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지금 죽을 만큼 힘들어하고 있는 나약함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어려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기영렬 목사
달라스 드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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