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곤 목사와 민족 복음화 운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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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CCC설립자 김준곤 목사
한국 CCC설립자 김준곤 목사

강순영 목사의 ‘부흥을 사모하며’ 


1907년 전후로 원산 대부흥, 평양 대부흥, 백만구령 운동을 통해 한국 땅에 대부흥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1970년부터 20년 동안 한국땅에 다시 대부흥을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 이 기간 동안 일어난 부흥운동의 중심인물로 사용하신 분이 바로 김준곤 목사(1925-2009)였다.

하나님께서는 김준곤 목사를 통해 한국 대학생 선교회(Korea CCC)를 설립하게 하시고 수십만명의 대학생들을 전도, 양육하여 한국 교계와 학계와 사회를 이끄는 수많은 인재들을 키우셨다. 

그들은 민족 복음화 운동에 헌신하겠노라고 선포한 후 수천회의 크고 작은 전도훈련을 실시함으로 전도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1974년에는 ‘엑스폴로(Explo74)’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열고 30여 만명을 여의도로 모아 합숙 전도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그 대회를 통해 한국교회에 민족복음화의 꿈을 심어주었고 전도하는 교회로 변화시켜 교회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어 1980년에는 80 세계 복음화 대회를 열어 이 기간에만 10만명 이상이 해외선교에 헌신함으로 선교한국의 기초를 마련했고, 그 결과 한국은 오늘날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됐다.


김준곤 목사의 성장배경과 CCC 운동의 시작

 

김준곤 목사는 1925년 전남 신안군 지도섬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 문준경전도사를 통해 신앙적 감화와 순교적 신앙을 배웠다고 한다. 1948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1953년에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숭일 중고등학교 교목과 교장을 역임했다.

김 목사의 제자들에 따르면 그는 예레미아서와 예레미아 애가를 가르칠 때마다 우리 민족의 수난과 연결시켜 눈물로 수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10월에는 아버지와 아내가 공산폭도에 의해 죽임 당하는 극한의 슬픔을 겪게 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뜨겁게 만나주심으로 형용할 수없는 영적인 기쁨을 체험하고 부친과 아내를 죽였던 공산 폭도들을 사랑으로 용서하고 그들을 전도했다.

6.25의 참상을 겪으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젊은이들을 복음으로 양육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라는 꿈을 심어주셨다. 이때부터 김 목사는 이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게 된다. 

1957년, 김준곤 목사는 공부도 하고 견문도 넓힐 겸 미국의 풀러 신학교로 공부하러 간다. 그곳에서 CCC를 설립한 빌 브라이트(Bill Bright) 박사를 만나 자신의 간증을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빌 브라이트 박사는 함께 대학생 선교운동을 하자고 제안했고, 동시에 한국 CCC를 시작하라고 권유했다. 그리하여 김 목사는 1958년, 한국CCC 대표로 파송 받아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하여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CCC가 시작된 나라가 됐고, 그 후 CCC는 국제 단체(CCC International)가 된다.

한국에 돌아온 김준곤 목사는 서울대학교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캠퍼스에 방문해 대학생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예수사랑, 나라사랑의 설교와 매년 열렸던 입석수련회를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변화를 체험한다.

한국 CCC 는 계속 확장되어 매년 주요도시들에 간사(Staff)들을 파송함으로 전국 주요도시들과 전국의 주요대학들로 확산됐다. 

현재 한국 41개 도시, 300여 대학에 850명의 전임간사를 파송해 2만여명의 대학생들이 양육받고 있고, 해외 주요대학에 460명의 간사들을 파송함으로 해외선교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지난 70년 동안 한국 CCC를 통해서 양육받은 사람들이 교회목사로, 선교사로, 선교단체 리더로, 대학의 총장과 교수로 많이 사역하고 있고 사업계, 의료계, 법조계, 정계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있다.

 

민족 복음화의 꿈과 다양한 사역들

 

재정을 비롯해 여러 가지 사역의 어려움 가운데서 1962년 겨울, 김준곤 목사와 몇 명의 Staff는 눈 덮힌 삼각산에서 ‘CCC 사역을 계속 할 것인가’를 두고 기도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민족 복음화의 환상을 주시며 ‘어렵지만 CCC 운동을 계속하라’는 격려를 주신다.

이후로 민족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김준곤 목사를 통해 다양한 사역을 펼치기 시작하신다.

첫째, 한국에 대통령 조찬기도회(후에 국가 조찬기도회로 바뀜)를 시작했다. 1966년 김준곤 목사는 국가 지도자들을 전도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자 조선호텔에서 ‘국가 조찬기도회’를 준비했다.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장, 미국의 기독교 지도자들, 각국 대사들, 교계 지도자들 등 276명이 참석하며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참석을 약속했으나 급한 일이 생겨 1회에는 불참하고 2회부터 계속 참석하셨다. 

대통령 조찬기도회(국가 조찬기도회) 이후에 도지사 조찬기도회, 군수 조찬기도회, 면장 조찬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나라의 각급 지도자들이 연초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께 함께 기도함으로 이를 통해 온 나라에 축복의 문과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둘째, 1968년에는 CCC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민족 복음화의 일선에서 헌신할 제3의 집단으로 ‘나사렛 형제들’을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민족 복음화를 위해 주도적으로 앞장서 헌신하게 했다.

셋째, 전군 신자화 운동을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군대 안에 좌파가 침투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갖고 군인들의 사상무장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이에 전군 신자화 운동이 강한 정신력을 가진 군대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제안함으로 이 운동이 시작되었고, 전군 신자화 운동의 실천사항으로 모든 장교들과 군인들이 한 가지 종교를 갖도록 정부방침으로 하달되었다.

이때 대부분의 군인들이 자신의 종교로 기독교를 선택함으로 군 복음화가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다.                                         

<다음편에 계속>

 

AMA 대표 강순영 목사

청교도 이주 400주년 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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