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시금석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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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삼석 목사 칼럼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높여 찬양하는 송영으로 시작하고 마칩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며, 목사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드려지며, 세례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집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통치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무한한 대속의 은혜 앞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값 없이 얻은 그 풍성한 생명의 부요함을 계속해서 누리며, 소망 안에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성령을 의지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 그리고 일상의 삶들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도우심은 고백 되고,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회와 성도들의 이해는 참으로 부족해보입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가 일어서고 넘어지는 가장 중요한 토대요 기독교 신학의 시금석입니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증인이나, 모슬렘, 유대교인들은 삼위일체를 삼신론이라고 비판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삼위일체를 인간의 사변적 부산물로, 신앙과 경건에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삼위일체에 관하여 잘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에 관한 복잡한 논쟁들을 싫어합니다. 

실제로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보듯이 삼위일체에 관한 진지한 탐구는 교회의 평화와 일치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는 이 신앙고백이 도전받는 것을 교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로 인식했을까요? 왜 교회는 생사를 걸고 이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한 힘든 싸움을 치렀을까요? 삼위일체가 기독교 신앙과 경건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지 않다면 말입니다. 

먼저 기독교 신앙과 믿음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중요성에 관하여 생각해볼까요?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토대로 합니다. 믿음은 다름 아닌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 그분과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그분의 행하신 그리고 행하실 일들에 관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그분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서 올바른 믿음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그 믿음의 토대로 하고자 한다면, 곧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피해갈 수 없게 됩니다.

 칼 바르트가 바르게 지적하는 것처럼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그분에 대한 질문 자체가 삼위일체에 관하여 숙고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성서의 진술들과 우리를 해후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칼 바르트, ‘교회 교의학’ 박순경 역, 대한기독교서회, 2006). 

구약성경의 어디에 삼위일체에 관한 증언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삼위일체에 관한 확실한 증언들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한 하나님 자신에 관한 계시의 발전적인 특성을 고려하면, 신약에서 아주 분명하게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안에 계신 삼위일체가 구약에서는 하나의 씨앗 형태로 예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밝혀낼 수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유대 문학에서 구약보다 더 발전된 삼위일체 개념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입니다(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신론’, 이승구 역, 서울: CLC, 1998).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빙자하여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들의 주장은 오히려 성경 계시의 특성상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많은 부분들이 구원론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복잡한 신학적 사변을 그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복음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부, 성자, 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게 됩니다. 구원론과 기독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을 직접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가장 순수한 복음은 곧 성부에 대한 증언과 그분의 통치의 도래였으며, 그리스도 자신의 사역도 곧 성령의 오심을 목적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16:7). 그렇다면 “성부, 성자, 성령 각 개별적인 삼위(세 분)가 어떻게 한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사변으로부터 시작된 질문이 아니라, 성경의 증언에 대한 성도들의 당연한 질문과 묵상을 통해 나온 것이 확실합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과 신앙고백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며, 그 근원적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의 연합과 일체에 관한 진지한 묵상과 반성 없이 우리의 믿음은 견고한 토대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론은 단순한 유일신론이나 다신론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만의 독특한 삼위일체 신론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토대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토대하고 있다면, 이 신론으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신앙과 경건의 내용은 다른 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의미와 능력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야말로 혼돈과 어둠을 물리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이 세상에 생명의 부요함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안에 믿음을 세우고 경건의 성을 쌓을 든든한 믿음의 초석입니다. 

오직 그 믿음의 토대 위에서만 기독교 경건도, 성도의 신앙도 능력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이 우리 교회들 안에서 다시 성령의 진지한 조명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방삼석 담임목사

달라스 뉴라이프 선교교회

Central Theological Seminary

조직신학 겸임교수

nlmcdalla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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