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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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현 목사 목회칼럼 

 

시대가 더욱 암울하고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크리스천이 있다 해도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듯 보입니다. 이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마치 사사기와 왕정 초기의 시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사사기에서 곧 바로 이어지는 사무엘상은 느닷없이 사가랴와 한나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불임을 고발하며 가나안 족속의 침략으로 고난과 억압 가운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소망 없는 가운데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자녀가 없어 괴로운 한나는 이 모든 상황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나중에 태어날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한나에게 기도해야 한다고 언지한 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되어서야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고, 마지막 사사 사무엘을 낳게 하셨던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기도의 자리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면(시 51:17), 하나님은 그 마음을 만져주시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임하는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나의 생명을 잉태치 못하는 상황은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임신은 히브리어로 ‘자비’를 뜻하기도 하는데, 대대로 이어가는 생명의 흐름이 단절된 여인의 모습 배후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지 한나의 기도를 통해 보여주고자 합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이미 알면서도, 한나와 같이 구하는 자리에 실제로 나아가기를 더디 하는 듯합니다. 대신 속상한 일들, 마음 상한 사건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자신의 시간을 채우는 삶이 자연스럽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로 만 향하여 간구하는 기도의 자리가 어색하기에,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 이렇게 편리한 시대에, 거룩한 노동인 ‘기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길까요? 돈이면 해결되는 황금만능주의 시대 속에서 ‘기도’ 즉,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얼마쯤 될까요? 

사사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가운데 전달하는 선지자가 되기까지, 그 배후에는 한나의 부르짖음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잊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비단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부르짖고 간구하는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적어졌다는 말은 비통하게도 사실입니다.

 

‘요즘 기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라기 보다 자신의 삶에 진정한 왕이 없으므로 자기의 소견대로, 자기의 고집과 원하는 대로 결정하는 일들이 많아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기도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기도하는 것이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종교행위라고 치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삶의 주인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온 세상과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시 우리 주변에 브닌나와 같이 우리의 마음을 격분시키고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 가운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할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나의 부르짖음과 간절한 기도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그토록 사랑하였어도, 한나에게는 적수인 브린나의 격분과 괴롭힘을 통해 기도의 자리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무엘’을 낳고 매일 눈물로 하루를 시작하고 우울하게 살았던 한나는 결국 ‘여호와로 말미암아 마음이 즐겁다’고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한나는 눈물로 씨를 뿌리고 기도의 열매로 사무엘을 낳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로 받은 아들을 하나님께 다시 드렸으니 한나는 다시 자식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요? 한나가 사무엘을 다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용기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온전히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가나도, 브닌나도, 엘리 제사장도 아니었습니다.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한 한나를 만나주셨습니다. 기도 외에 이런 유가 나지 않습니다. 

기도의 사람이 승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보통 문제가 생길 때, 전문가를 찾아가거나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까 고민하며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고 분석하여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마음을 아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핏값 주고 사신 자녀에게 분명하게 원하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렘 33:3)”,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은 반드시 풀어주리라(눅 18:7).”

우리 모두 가장 좋은 것,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엎드리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마 7:11, 눅 11:13). 칡흙같이 어두워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을지라도 기도의 자리를 사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권두현 목사
현재, 달라스 동부 장로교회
부목사 (행정 및 교육 담당)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 대학원
목회학 박사 과정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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