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칼럼] ‘고도’를 기다렸던 사람들 … 내 고국 정말 잘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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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말한다.  –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확실한 건 이런 상황에선 시간이 길다는 거다. 그러니 우린 뭐든 거동을 하면서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거지. 뭐랄까 언뜻 보기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버릇이 되어 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 넌 그게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말할지 모르지…” 

 그리곤 계속 혼자서 주절거린다. - “헌데… 그 말은 나도 알겠다만,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야. 너…내 말 알아 듣겠냐 ? “

 

 무대에는 달랑 나무 한 그루 서있는 시골길에 두 사내가 등장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들은 ‘고도’(godot)란 미지의 인물을 기다리는 중이다. ‘고도’는 곧 온다고 하면서도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고도를 끊임없이 기다리면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에스트라공이 ‘이제 우리 가자’고 하면 블라디미르는 ´안돼´라고 한다.  왜? / 고도를 기다려야 해 / 하긴 그래 / (잠시 뒤) 너는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신하니?  /그를 기다려야만 하느냐고? / 그가 저 나무 앞에서 말했어 / (그들은 나무를 쳐다본다)  저게 뭐야 / 버드나무라고 하는 거야 / 나뭇잎들은 어디 갔지? / 다 떨어졌어 

  

 이 두 사내에 이어 럭키와 포조란 두 인물이 더 등장한다. 그들은 제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떠들면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세상을 뜨려고 하지만, 끝내 결행하지 않는다. 그들도 그냥 기다릴 뿐이다. 이 지리한 줄거리ㅡ기묘한 네 사내의 하염없는 기다림을 그린 부조리 극은 1952년 발표된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쓴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이다.

 

 참 아리송한 대사의 연속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그러나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도’는 무엇일까? 그러나 실제 ‘고도’는 의미가 없다. ‘무의미의 의미.’ 연극을 보면 텅 빈 공간에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달랑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고도’를 기다리면서 길고 긴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의미가 없는 듯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짓을 하는 네 명의 인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그리고 럭키와 포조. 이들이 우리의 삶을 풍자한다.  

 

 ‘극단 산울림’의 대표로서 연극계 원로인 임영웅 선생은 몇 년 전 80세 산수 (傘壽)를 맞는 기념으로 이 연극을 다시 한번 연출하며 이렇게 말했다.  – “대체 ‘고도’는 누구인가? 그들은 왜? 무엇 때문에 기다리는가? 이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관객 대다수는 고도를 신(god)으로 해석하지만, 작가인 베케트는 “이 연극에서 신을 찾지 말라”고 했다.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리가 왜 이 지상에 태어났는지를 모르지만, 삶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동시에 무의미함을 깨닫는 인간의 이야기로 보면 된다”고 했다.

 

 사실적으로 봐도 ‘고도’는 텅 빈 존재다. 다만 이 연극을 보는 관객, 혹은 이 희곡을 읽은 독자는 이 ‘고도’에 각자의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상 ‘고도’에는 아무 뜻도 없다. 이 희곡에 숨은 뜻은 각자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또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는 문학의 특징은 결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말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한다’. 의미 없는 것들로 의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야기가 없다. 따라서 갈등도 없는 것이다” 라고.

 

 책이든 연극이든 꼼꼼히 ‘고도를 기다리며’를 분석해 보면, 등장인물들이 모두 시간 관념이 없다. 그들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언제나 현재다. 무질서와 혼란의 세계, 그 세계에서 시간은 언제나 현재이고   이야기는 하나도 성립되지 않는다. 참 이해하기가 난감하지만, 그렇더라도 ‘지금’을 실아가는 사람들은 이 ‘따분한 삶’에서 지금도 나를 구원해 줄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인가. 나는 오늘 이 글을 다시 쓰며 혹시 우리에게 ‘고도(godot)’가 마치 요즘의 흥미거리였던 윤석열, 이재명, 안철수 따위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 않았나 싶다. 

 

 지난 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후보들 중 한 사람인 윤석열 후보가 당선이 되었고, 곧바로 선관위의 공식절차를 밟아 대한민국 제 20대 대통령이 되었음이 확정되었다. 모두 축하하고 환호해야 힐 시점에 나는 왜 불현듯 이 흘러간 연극을 떠올렸을까. ‘고도’를 기다리는 현대인, 그 따분한 삶…우리 일상에 늘 끊임없이 펼쳐지는, 서로 치고 박고 할큄으로써 애매한 국민만 상처주는 일이 또 다시 벌어질까 지레 걱정부터 앞선다. 제발 내 태어난 나라가 앞으로는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다. 

 

손용상 논설위원


※ 본 사설의 논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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