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의 배경이 되는 신구약중간기 팔레스타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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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Kim의‘재미있는교회사이야기’ (2)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기 때문에 각 권마다 저자가 다르고, 저자의 시점과 때가 다르다.





                그런데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사이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약 400여년의 기간이 있다. 갑자기 신약성경을 건너 뛰면서 시대와 모든 환경이 변해 버렸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처음 읽을 때 시대적 환경을 모르면 여러 단어 등의 표현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짧게나마 신구약 중간기의 팔레스타인 시대를 알아볼 필요를 느낀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의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이었고, 이후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였다. 그 이후에 팔레스타인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제국의 시대를 거쳤고, 유대인은 잠시 마카비 가문의 혁명을 통하여 하스몬 왕조 기간에 독립국가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이 시대에는 통치자가 대제사장을 겸하기 시작하였던 때였다.





                당시 왕이었던 알렉산테스 야나이우스(B.C 103 – B.C 76)는 영토를 다윗시대 만큼 확장하는 등 군사적으로는 탁월했으나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바리새인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이후 왕권을 이어받은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바리새인들과 화해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후 주전 64년에 드디어 로마의 장군인 폼페이우스가 유대를 점령하게 하게 된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하스몬 왕조의 신하였던 헤롯 안티파터를 유대 전체의 총독으로 임명함으로 하스몬 왕조는 사라지고, 본격적인 로마제국의 식민통치가 시작된다.





                당시 로마제국은 식민지 유대에 통치자로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을 분봉왕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로마에서 총독을 보내어 정치와 군사를 맡기고, 종교는 유대의 대제사장에 맡기는 식으로 유대 땅을 통치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로마군의 병력을 예루살렘이 아닌 분봉왕 헤롯(통치기간 B.C 37- A.D 4) 이 건설한 로마식의 신도시 가이사랴에 주둔케 하고, 총독의 집무실도 가이사라에 두었다.    





                이후 헤롯 이후 몇 대의 분봉왕을 거쳐 그의 자손인 헤롯 아그립바1세가 죽은(A.D 44) 뒤로 로마는 분봉왕이 아니라 유대 전체를 총독에 의한 직접 통치로 전환했다. 신구약 중간기 유대역사의 대략은 이러했다.





                살펴본 대로 팔레스타인 땅은 남유다가 멸망한 이래로 오랜 기간동안 고난과 식민통치 하에서의 유대민족의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터어키)와 아라비아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시대를 제패한 제국들이 늘 탐을 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이 땅에 오셨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첫 일성(一聲)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 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첫 선포로부터 시작된 복음 전파는 신약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시피 예수님의 승천 후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본격화되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처음에는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시기도 하셨지만 주로 회당 (synagogue)에서 복음을 전하셨다. 그렇다면 왜 주로 회당이었을까? 그곳은 기독교 신앙의 첫 신자들이었던 유대인들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난의 역사 가운데 유대교에는 여러 형태의 당파가 출현하였다. 그 중 신약성경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가장 유명한 당파였다. 주로 로마의 통치와 헬라 문명의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 일반 민중들의 당이었다. 이들은 율법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다른 유대인들의 당파로는 사두개파와 에세네파가 있었다. 먼저 사두개파는 주로 유대 귀족층들이었으며 이들은 로마의 후원 아래 주로 성전에 관심을 두었다. 에세네파는 사해 지역에 격리되어 금욕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들 중에서 성전이 무너진(AD 70-1948) 후에도 생존할 수 있었던 유대교는 바로 바리새파였다.





                그들은 이미 바벨론 포로시대로부터 어차피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하였기에 종교생활의 중심을 율법에 두며 이를 가르치기 위해 지역마다 회당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미 1세기 당시 로마 제국 전체 지역으로 잘 닦여진 길을 따라 퍼져 있는 로마의 식민 도시들에 디아스포라(Diaspora, 분산된)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의 회당을 통하여 자신들의 전통과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를 지속적으로 지켜왔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도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때 그들의 필요에 의해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당시의 공통 언어였던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 학자들의 번역인70인역(Septuagint) 구약성경이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언어를 포함한 문화는 헬라의 영향을,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영향(Greko-Roman Culture)을 받았는데 이는 신구약 중간기 시대의 유산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문화적 배경 가운데 신약성경이 시작하였고 이후 초기 기독교는 지금까지 전파되었다.





Daniel Kim





한국정부 국책금융기관 여신심사 및 신용평가역
Financial Consultant
LA 소재 한국정부 투자금융관 역임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 석사
현, 플라워마운드교회 전도·선교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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