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에 힘쓰는 자를 마침내 도우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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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Kim 신앙 칼럼









                이미 지난 주 ‘교회사 이야기’ 다섯 번째 편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향한 여러 가지 편견과 질문들에 대해 나눈 바 있다. 오늘은 그 중에서 ‘하나님은 왜 세상의 악들을 아직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는가? 왜 믿음의 사람들도 동일하게 고난과 환난을 경험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믿음이 없거나, 아직 연약한 경우에는 대부분 이 질문에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에 대해 부정하거나, 아니면 믿음이 있는 듯하였지만 거꾸러지고 만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도대체 하나님이 있기는 하는 거냐며 독설을 퍼붓고 좌절한다. 실제로 성경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기2:8-9)’





                욥이 당대의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이 다 죽고 자신의 기업마저 무너졌다. 거기에 심지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그 힘듦이 얼마나 깊었던지 자신의 몸을 질그릇 조각으로 긁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다른 이도 아닌 그의 아내가 남편과 하늘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 장면이다.  





                그녀가 잘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단순히 그녀를 쉽게 정죄하고자 함이 아니다. 인생을 그런대로 순탄하게 살았던 이들은 욥의 아내의 심정을 어쩌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아무리 그렇기로 서니 남편과 하나님을 욕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지만 오죽 힘들고 답답하면 저랬을까 하는 아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기도하며 깨닫게 된 것은 이것이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의 시편을 읽고 있노라면 참 많은 위안을 받게 된다. 다윗의 삶은 결코 평탄한 삶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 되기 전에도 그 이후 왕이 되어서도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때로는 배신당하여 도망치기도 했으며,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수치와 모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한 장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시편 18:4-5)’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삶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어렵고 힘든 환난의 때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심지어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까지 허락하셨다.





                어떤 이는 이를 불만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마도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로봇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영이 없는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서만 살았을 것이다. 사자가 말을 사냥하여 죽이는 것이 죄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악인이 있을 수밖에 없고, 악인을 통해서 힘든 고난과 수치를 당하는 일도 있을 수 있으며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악인의 일을 행하기도 하여 스스로 환란과 징계를 받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거나 드라마, 영화를 볼 때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 자신도 악역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는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만약, 악인이 죄를 짓자 말자 하나님이 바로 징계하시고 멸하신다면 아마도 이 땅에 살아 남아 있을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우리가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계신다. 그래서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회복되는 때까지 시차의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신다(예레미야 25:14; 마태복음 16:27).





                그렇다면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사는 자는 무엇이 다른가? 날마다 삶의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며 살았던 경험이 켜켜이 쌓여 있는 사람은 위기의 순간이 올 때  힘들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경건의 능력이 나타난다. 영적 성숙에서 오는 담대함이 능히 환란을 이기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통해 주시는 용기와 지혜로 무장해야만 한다. 우리의 인생을 세밀히 돌보시는 예수님을 구주로 삼는 자는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상황이 역전되기 때문이다.





                설사 이 인생 가운데 그런 일이 없다 할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 1:21)’ 고백하며 잠시 사는 이 땅의 나라가 아니라 영원히 주님과 살게 될 실재(實在)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날마다 그렇게 경건에 힘쓰는 자가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온전히 올려 드릴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도우신다. 오늘로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를 사모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 앞에 감격으로 서고 싶다.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시편 18:46)’ 아멘.





Daniel Kim





한국정부 국책금융기관 여신심사 및 신용평가역
Financial Consultant
LA 소재 한국정부 투자금융관 역임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 석사
현, 플라워마운드교회 전도·선교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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