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용서할 수 있는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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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지상 사역 중, ‘용서’에 대한 가르침은 복음의 중심을 차지한다. 아마도 개인적 평온한 삶과 공동체 생활의 안녕, 나아가 전 지구적 평화를 위해선 ‘용서’가 그 요체임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닐까 한다. 다른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심지어 비논리적이다. 오죽 했으면, 인간이 행하기 가장 힘든 3가지 중 으뜸이 용서라고 했을까?1 우리는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함을 시도해 봄으로서 깨달을 수 있다. 더욱이 이 어려운 용서를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용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를 소개한다.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유대계 이탈리아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는 그의 자서전 〈주기율표, The Periodic Table〉에서 이렇게 말했다.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아마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후회의 표시를 보이는 경우에만, 그러니까 그들이 적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반대의 경우,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고, 남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용서하면 안된다. . . .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그를 심판하는 것이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2

레비는 무조건적 용서가 아니라 용서의 조건을 언급함으로서, ‘공소시효 없는 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음을 고백한다. 조건에 충족되지 않으면 가해자를 심판하는 것이 정도(正道)이지 용서란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신앙없는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불행히도,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레비는 결국 자살로서 그의 삶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이렇듯, 우리의 나약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몸소 용서의 방법을 보여주셨다. 타인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셨고, 예수님 자신에게 죄 지은 자도 용서하셨으며, 이와같은 용서를 그리스도인들이 조건없이 실천해야함을 가르치셨다. 본격적인 용서의 가르침은 베드로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형제가 죄를 짓거든 바로 잡아주어라’는 말씀을 마치자 마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쭙기를,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 (마태 18:22)”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 있어 용서의 횟수는 상징적 숫자이다. 가르침의 핵심은 죄의 빈번성에 상관없이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한번도 행하기 힘든 것이 용서인데, 무한정 용서한다는 것이 인간을 향한 바른 가르침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선 용서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의 본질은 ‘사람 자체를 보라는 것’이다. 나에게 가한 죄의 횟수 그리고 경중을 떠나, 바로 ‘그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방법과 동일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눈 감으신 이유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를 사랑해 주신 그 은혜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죄는 보지 않으시고, 다만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참된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기에 조건없이 용서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용서는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용서의 ‘마땅함’이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한다는 역설로 용서의 마땅함을 설명하셨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 (마태 18:23-35)에서 무자비한 종은 옹졸한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무한 용서를 베푸셨건만, 용서를 받은 인간들은 이웃의 작은 허물도 용서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용서, 인간의 숨막히는 비정과 협량함이 이 비유에서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질책하신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았느냐?” (마태 18: 33) 이와 같이, 용서하는 것은 추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용서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의지의 표현으로서 ‘마땅히 해야됨’ 이다.

두번째는, 예수님의 용서는 ‘치유’의 용서였다. 예수님의 용서는 육체의 부자유함을 회복시키고 내면의 고통을 치료하는 기적의 말씀으로 구현되었다. 이는 용서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치유로 귀결되는 기적의 은혜임을 보여준다. 가버나움에 행하신 ‘중풍병자의 치유기적' (마가 2:1-12, 마태 9:1-8, 누가 5:17-26)과 십팔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허리를 펴지 못하는 여인 이야기’ (누가 13:10-17)는 용서가 바로 치유의 행위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치유의 용서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신적인 권위를 드러내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자는 타인에 대한 용서를 실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신의 치유함을 받은 기적의 은혜를 체험할 것이다. 또한 ‘많은 죄를 용서받은 여자’ (누가 7:36-50)와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 이야기’ (요한 8:3-11)는 그리스도의 용서의 권능이 육체적 치유만이 아닌 ‘마음의 치유’에도 미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세번째, 예수님은 진정한 용서는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치쳤다. 인간의 용서는 여러면에서 불완전하다. 때문에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용서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세우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이웃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에 신음하고 있는 죄인을 돌아오게 하는 힘, 다시 말해 용서의 힘은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용서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요한1서 2:12) 이러한 용서와 사랑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통찰에 근거한다 (요한1서 4:7-8).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양 비유’와 (누가 15:4-7), ‘잃어버린 은전 비유’ (누가 15:8-10), ‘탕자의 비유’ (누가 15:11-32) 등에서 용서와 사랑, 그리고 회복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이며 원천적인 힘은 합리적 이성에 앞서 ‘초월적 사랑’에 있다. 초월적 사랑은 인간의 감성과 이성을 넘어서 존재하는 ‘자유와 평화와 기쁨 이 있는 그 자리’에서 뿜어나온다. 참된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사랑은 자신의 의식세계에서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이해되는 심연의 깊은 그 자리에서 발산되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인 것이다.

 

1. Benjamin Franklin, Poor Richard’s Almanack (Waterloo, Iowa: The U.S.C. Publishing, 1914), 12, 26, 39. 프랭클린은 인간이 지키기 힘든 3가지로 (1) 용서, (2) 비밀을 지키는 것, (3)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2. Primo Levi, The Periodic Table (New York: Schochen book Inc., 1975), 153

 

이재호 목사

 

이재호목사의 칼럼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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