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감각적 경험과 일상의 현실에 휩쓸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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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Kim의 ‘책 속에서 발견한 영성과 지혜’





C. S. 루이스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년 11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평신도이다. 또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철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고,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까운 친구에게는 잭(Jack)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부모의 사망을 계기로 무신론자가 되기도 했지만, 로마 가톨릭 신자인 J.R.R. 톨킨과 다른 친구들의 영향으로 30세 때인 1929년 성공회 신앙을 받아들여 성공회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평생 신앙생활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 동아리인 잉클링스의 멤버였으며, 《반지의 제왕》의 저자인 톨킨과 우정을 유지했다. 그는 개신교도였지만 개신교, 로마 가톨릭교회 등 기독교의 교파를 초월한 교리를 설명한 루이스의 삼단논법과 같은 기독교 변증과 소설, 특히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하다.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지나도 변함없는 영성과 지혜가 넘치는 고전들이 많다. 그런데 C. S. 루이스의 말대로 이 시대는 어떠한 법칙이나 원리 등을 접할 때 그것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먼저 따지기 보다는 ‘학문적이냐 실용적이냐’, ‘케케묵은 것이냐 새로운 것이냐’, ‘인습적인 것이냐 과감한 것이냐’를 따진다.
그래서 실용적이어야 하고, 새로운 것이며, 과감한 미래 지향적인 것이 아니라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복잡다단하고 물질주의로 팽배한 사회에서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을 제대로 살려면 지금 우리가 선택한 것이 과연 참인가를 따져볼 지혜가 필요하다. 단순히 유행처럼 말하는 ‘인문학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다.
우리의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영성과 지혜에의 추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깊은 우물에서 생수를 긷는 것처럼 책 속에서 영성과 지혜를 발견하여 우리의 영혼 가운데 부어 우리의 삶이 다시 진정한 생기와 존재의 가치를 찾는데 이 코너가 마중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먼저 손에 잡힌 책은 C. S. 루이스의 깊은 통찰과 변증적 해학이 짧은 글 가운데 흘러 넘치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이다. 여기에서 스크루테이프는 사탄으로, 담임목사격에 해당하는 자다.
그는 조카이자 사탄의 부목사격인 웜우드에게 서신을 통해 사탄목회 코칭을 하고 있다. 그의 편지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사탄에 놀아나고 있는 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진리를 무시하고, 누구든지 옳을 수 있다는 ‘상대주의’와 소비자가 왕이라는 ‘소비자 중심주의’에 익숙한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게는 이렇게 역설적인 변증적 접근이 더 크게 메아리를 울린다.






이제는 화자를 바꿔야 한다. 말하는 자는 사탄 담임목사인 스크루테이프다. 그는 사탄의 시각으로 인간의 세태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인간들의 주된 시선은 보편적인 진리나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저 찰나의 감각과 경험의 흐름에 붙들려 이것을 ‘실제의 삶’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인간은 평범하고 세속적인 것의 압력에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닌다.
눈 앞에 펼쳐지는 친숙한 일상에 시선이 붙들려 생소하지만 미지의 진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고 일갈한다. 비록 사탄이지만 그는 자신의 목회를 위해서 인간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사탄은 인간이 혹여나 보편적인 진리나 주제에 관심을 돌리려 하거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눈 앞에 보이는 찰나의 감각과 경험이 ‘실제의 삶’이라고 믿도록 만들게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섣불리 ‘이성’이나 ‘논증’을 통해 가르치기 보다는 그저 실용적인 선전을 위한 ‘전문용어’ 를 사용하여 인간이 ‘실제’가 무엇인지 절대 묻지 못하게 한다.






논증이나 과학으로 가르치려 하다가는 인간의 이성을 작용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성이나 논리는 ‘원수 (사탄의 원수는 하나님이다)’가 더 강하다. 그러기에 사탄은 인간에게 차라리 과학보다는 경제학이나 사회학에 관심 갖게 만들려고 한다. 불변의 진리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인간의 현실문제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참으로 기가 막힌 사탄의 전략이 아닌가!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이러한 눈에 보이는 ‘현실의 삶’과 ‘실제의 삶’에 대한 통찰을 주는 내용이 나온다. 키아누 리브스가 연기한 ‘네오’는 마침내 ‘트리니티’라는 여인의 안내로 가상의 삶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의 현실이 사실은 인공지능(AI)이 만든 인공자궁 속에서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침내 실제의 삶인 매트릭스 밖의 우주를 만나고, 다른 인간들이 가상의 삶인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오도록 돕는다.






하지만 그의 동료였던 ‘사이퍼’는 끊임없는 AI의 공격과 위협 속에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매트릭스라는 안락한 가상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동료들을 배신한다. 마치 광야 땅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다가 모세에게 불평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도전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다.
현실이라는 감각적 찰나의 현상에 빠진 우리에게 ‘보물을 좀먹는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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