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從)의 영(靈)인가? 양자(養子)의 영(靈)인가?

0

로마서 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앞뒤의 말씀들을 보아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특권들을 나열하면서 이전에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었지만, 이제 다시는 그런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혹자는 이것을 ‘사단의 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사단의 영’을 받았었지만, 이제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다시’라는 말은 그런 의미의 ‘다시’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한 번 사단의 영을 받은 사람에게 또 다시 사단의 영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필요도 없고 또한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두 번 사용된 ‘영’을 모두 정서나 감정, 혹은 기질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서워하는 노예적 정신, 공포와 절망과 낙담의 느낌을 받지 아니하였고, 기쁨과 용기를 주는 정서와 기질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항상 기쁨과 용기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견해는 처음에 나오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정서나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두 번째 나오는 양자의 ‘영’은 성령님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래서 어떤 영어성경에는 첫 번째 ‘영’을 소문자로 ‘spirit’라고 쓰고, 두 번째 ‘영’을 대문자로 ‘Spirit’로 쓴다. 이들은 우리를 양자되게 하는 영이 성령님이라는 이유에서 그렇게 해석한다.

아울러 이들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는 말씀을 근거로 성령님은 결단코 종의 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불신자와 신자의 대조로 이해한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감각한 죽은 자들이며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인데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으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먼저 이것은 성령님께서 일하신 결과이다. ‘다시’라는 말을 유념해야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너희가 전에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었지만 이제는 다시 그것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는가? 바로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서이다. 다시 말하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영을 산출하신 분은 성령님이신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방편으로 해서 이같은 일을 행하신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자신은 죄책감과 무서운 종의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절규한 것과 같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나의 죄를 드러내며 죄책감과 자신의 악함과 무능력에 대한 절망감을 갖게 할 뿐이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역사를 시작할 때 하나님 앞에서 무서워 떨며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드신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전적으로 부패한 죄성을 지닌 자임을 인정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8-19)
이런 마음과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의 두려움과 무서움을 성령님께서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며 믿도록 역사하는 전초 단계라 할 수 있다.
어느 인간이 이런 상태를 느끼며 인정하지 않는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며 그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에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처절한 인정과 두려움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졌던 ‘무서워하는 종의 영’인 것이다.
그리고 지옥이나 하나님의 징벌이 두려워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여전히 무서워하는 종의 영의 상태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녀가 아닌 종의 상태와 수준인 것이다.
혹시 나는 아직도 무서워하는 종의 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이정엽 뉴비전교회 담임목사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 네이버로 보내기
  • 텀블러로 보내기
  • 핀터레스트로 보내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