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로 도시 문은 닫혔지만 복음의 문은 점점 더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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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리포트 | 인도 김령미 선생(가명) 

 

김령미 선생은 GP(Global Partners) 선교회(한국 대표 김동건 선교사) 소속으로, 1993년 파송 받아 현재까지 인도와 한국 본부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인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고, 9월 현재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코로나 19 누적 확진자 수가 많다. 김령미 선생을 통해 지역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어보기로 하자.

◈ 언제부터 인도에서 사역했고, 어떤 일을 주로 하고 있는가?
1993년 3월 독신으로 인도에 갔다가 2001년 가족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가 GP 선교회 훈련원 총무로 본부 사역과 인도 근로자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했다.
이후 결혼해 남편과 함께 2007년 북인도 지방 소도시 A로 들어갔다. 교회를 개척하고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던 중 남편이 과로와 고혈압으로 쓰러져 주님 곁으로 갔다.
지방에서 혼자 남아 사역하는 것은 좀 위험할 것 같다는 본부의 판단에 따라 도시 지역으로 이주해, 현지인 교회를 개척해 운영하며 현지인 사역자를 훈련하는 목회자 훈련과 가난한 어린이들 교육을 돕는 장학사역을 하고 있다.

◈ 27년 전 왜 하필 인도를 선교지로 정했는지?
대학교 1학년 19살 때 예수를 믿었다. 예수 안 믿을 때 꿈이 히말라야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으며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히말라야로 가려고 했는데 집안에서 반대하셨다.
그럼 ‘대학을 졸업하고 나중에 성인이 되면 그때는 부모가 반대해도 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 끝에, 히말라야와 가장 가깝고 연관이 있는 전공을 골라 1979년에 한국 외국어 대학교 인도어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예수님을 만났고, 이후 사도행전 성경공부를 하다가   ‘예수를 통해 참된 도를 만났으니까 이제 인도에 선교하러 가겠다’고 서원했다.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됐는데 문득 선교 가기가 무섭더라. 그래서 ‘학교 그만두고 도망가면 선교사 안 시키시겠지’ 하고 휴학을 했는데 그 날로 온 집이 망했다.
아버지가 선거에 출마하셨는데 떨어지고 큰 빚을 졌다. 요나서 말씀이 생각났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세상이 풍파를 만났나 싶어서 하나님께 돌아갈테니 풀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하자 마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때 그린벨트에 묶인 큰 땅이 있었는데 그린벨트가 풀리고 빚을 한꺼번에 갚게 됐다. 그날로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집을 떠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신학을 시작하고, 1년 정도 교회 사역하고 훈련을 받아 인도로 떠났다.
처음 독신으로 갈 때는 교단 파송을 받아 팀선교를 떠났고, 처음 사역했던 북인도는 남인도와 달리 사역을 개척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팀과 같이 하니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었다.

◈ 코로나 19로 인도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나?
3월 22일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집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정부 조치가 발동했고, 곧이어 나라 전체가 봉쇄돼 출입이 전면 금지됐다.
5월에는 봉쇄조치가 앞으로 세 달 정도 더 연장될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아 그동안 시골로 떠나지 못했던 지체들도 차를 빌려 돌아갔고, 나머지 사람들도 돌아가기 위해 여러 방편들을 계속 강구했다.
북쪽 펀잡 지방에서는 돌아갈 교통수단을 얻을 수 없게 되자 아이를 여행가방 위에 얹고 800km를 걸어서 집으로 가는 여성 이야기, 길거리에서 출산했다는 이야기, 귀향길 기차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소식도 들려왔다.
사실 시골에는 주변에 논밭이 있어서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는데, 도시는 근로자들이라 공장 문을 닫으니까 당장 먹을 게 없었다. 모두가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는 봉쇄가 시작되고 나서 한 달 후부터 구호사역을 시작했다.

◈ 어떻게 구호사역을 진행하고 무엇을 나눠줬는가?
대부분 교회들이 문을 닫아서 예배를 못 드리는데, 우리 교회가 큰 길가가 아니라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어 봉쇄조치에도 문을 닫지 않아도 됐다.
우리 교회는 쪽방촌같은 일반 주거건물 옥상을 사용하는 거라 모임이 가능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같은 건물 안이나, 혹은 교회에서 2-3분 거리에 산다. 나는 외국인이라 조금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현재 지급되는 구호품은 통밀 10kg, 달콩 1kg, 쌀 5kg, 겨자유 1kg, 빨래비누와 세탁비누 한 장씩, 할디 양념 150mg, 소금 1kg, 콩단백 250mg 등 총 11달러 상당의 생필품인데, 4인 가족이 약 2주 정도 버틸 수 있는 양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왔다. 골목길에서 6,70명에게 구호품을 나눠주며 간단히 복음을 전했다. 지금은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돼서 교회 출석도 권하고 있다. 다섯달째 꾸준히 진행하다보니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복음도 충분히 전할 수 있게 됐다.
구호사역을 시골에서도 하고 있는데, 돌아보니 코로나 19가 오히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어린이 사역도, 여성 사역도 늘고 있다.
구호사역도 돈이 있어서 시작하게 된 것은 아니다. 4월 달에 은퇴하신 선교사님께서 2만 루피, 한국돈으로 32만원 정도를 보내주셨다. 여기에 내가 가진 2만 루피까지 합쳐 4만 루피를 가지고 시작했다.
정말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 하기에 청년들이 가정을 방문해 일일이 조사하고 표를 작성해서 대상자를 선정하고, 6,70명에게 일주일에 세 번씩 200명 정도를 돕기 시작했다.
믿음으로 시작하니까 사방에서 돕는 손길이 나타나서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고 성도들을 비롯해서 모두 자기 것들을 이 일에 헌신했다. 구호사역을 하니까 관계가 좋지 않았던 이웃들과 사이도 좋아졌다.

◈ 구호사역 외에 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교회와 더불어 목회자 훈련원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 오는 시골 목회자들 중 많은 이들은 배움이 짧다.
그래서 최근 생각해낸 것이 말씀과 기도로 돌파를 일으켜 보자는 것이어서, 1년에 300구절을 암송하고, 하루 다섯 시간씩 기도하고 성경을 읽자는 목표를 이번 9월부터 가지고 지도하고 있다.
코로나 19 때문에 사역이 넓어졌다. 현재 1부 예배 같은 경우는 구호사역 받으러 오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전도말씀을 전한다.
2부 11시 예배에는 기존 교인들과 1부 때 감동받으신 분들이 다시 나온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학교도 못 보내고, 마을 중앙에 놓은 펌프 하나로 생활하는 등 상상할 수 없이 어려운 형편에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방과후 학교운영 등 도움을 주려고 계속 노력하는데, 그들이 복음 안에서 상황과 형편이 변화될 수 있도록 관심 가져주시고 기도해주시길 부탁한다.
김지혜 기자 ©  K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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