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운동이 영적 생활과 교육, 산업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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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Kim의 재미있는 교회사 이야기 

 

힙포의 어거스틴이 죽은 후 얼마 안 돼 야만족인 고트족이 침입했고, 이후 서방 로마제국은 순차적으로 기울어가며 마침내 여러 이방족들에 의해 분할됐다. 교회사의 구분으로는 이렇게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중세의 문이 열린다.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서방 유럽은 이방민족들에 의해 침략에 시달리며 혼란의 상태가 지속됐다. 하지만 이 침략자들은 점차적으로 자신들이 정복한 피지배민족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삼위일체 전통 니케아 신앙으로 개종한 중세 서방의 여러 민족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두 개의 제도가 있었다. 하나는 수도원 운동이고, 또 하나는 교황제도이다. 먼저 수도원 운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초대 교회의 수도원 운동을 살펴보았던 것처럼 당시 교회는 제국의 권력들과 유착해 주교는 마치 봉건 영주와 같은 권력과 토지를 불하 받게 됐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초대 교회 때로부터 믿음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하는 방법으로 수도생활을 택하게 됐다. 물론 수도원 운동은 동로마 제국에서도 왕성했지만, 특히 서방제국에서는 보다 실질적인 경향을 띄게 됐다. 영적인 훈련과 동시에 육체의 훈련도 중요시하며, 단순히 독거 생활을 하기 보다는 공동체 생활을 선호했다. 

 

특히, 서방의 수도원 운동은 교회와 계속적인 갈등을 겪지 않았으며 교회와 서로 돕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 서방 세계 수도원 운동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이는 바로 5세기 후반, 6세기 초반 인물인 베네딕트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금욕생활을 하며 명성이 높았는데,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몬테카시노에 수도원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는 수도원 공동체를 위해 ‘규율집(Rules)’을 작성해 수세기 동안 서방 세계 수도원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피하고, 엄격하지만 너무 지나치지 않는 수준에서 질서와 규범을 만들어 수도생활을 이끌었다. 

그들은 하루 두 끼의 바른 식사를 했는데 싱싱한 과일과 채소, 적당량의 포도주를 수도사들에게 제공했다. 

그들은 평생동안 특별한 이전 명령 없이는 한 수도원에서 종신 수도사로 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규율집을 통해 순종이 강조됐다. 수도원장도 독재할 수 없었으며 하나님 앞에 스스로 규율집을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규율집에 의거해 권면했으며, 규율을 따르지 않는 이는 공동체 앞에서 문책했다.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으면 체벌을 가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추방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회개했을 경우에는 다시 받아 주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을 세 번까지 허용했고, 그 이상은 수도원에서 영영 추방됐다. 

 

이러한 규율집은 수도원 운동이 효과적으로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 서방 세계 수도사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후일 교황이 된 그레고리에게도 알려져 로마 시민들도 이 규율을 따랐다. 

또한 영국의 선교사로 파송된 어거스틴에 의해 규율집은 대륙을 넘어 알려졌고, 교황청의 지지 속에 서방 교회 전체에 영향력을 끼쳤다. 

수도사들은 규율집에 의거해 특별히 병에 걸렸거나 다른 재능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그들은 노동을 신성시했는데 그렇기에 이러한 노동 순서와 당번을 정할 때 모두 예배 시간에 발표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질서를 확립했다. 

당연히 그들은 수도사였으므로 기도에 전념했는데, 매일 새벽 기도부터 시작해 하루 여덟 번의 기도 모임을 가졌다. 시편은 일 주일에 전체를 한번씩 낭송하도록 했고, 교회력에 따라 결정된 성경을 강독했다. 그들은 이렇게 각각의 기도 시간에 읽어야 할 성경을 정리한 ‘성무일도서’에 따라 날마다의 경건시간을 가졌다. 

 

그렇다보니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시편 전체와 성경의 주요 구절들을 암기할 정도가 됐다.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성경과 경건 서적들을 필사해 후대의 교육을 위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역할을 감당했다. 또한 지친 나그네들을 위한 여관의 기능 뿐만 아니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 약국의 역할까지 감당했다. 

또한, 수도원은 지역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대부분의 수도원이 불모지에 세워져 수도사들의 노동으로 일구어 낸 경작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부유층들이 육체 노동을 천하게 여기고 노예나 서민들에게만 부과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과는 별개로 수도원은 귀족 출신이라 하더라도 모든 수도사에게 공통의 노동을 부과했다. 

 

수도원 운동을 통해 중세 유럽의 농경지 면적은 급격히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이 갖고 있는 포도원이나 기타 농작물은 그 지역에 막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가졌다. 지금도 유럽의 유명 포도주 중에 수도원 소유의 포도 농장이 있는 것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인다. 

중세 수도원은 이렇게 영적인 훈련만 하는 곳이 아니라 생활과 교육, 산업이 결합된 기능을 통해 지역 사회 뿐만 아니라 전 유럽과 교회에 큰 역할을 감당하는 자리매김을 했다.   

 

다니엘 김

한국정부 국책금융기관 여신심사 및 신용평가역

Financial Consultant

LA 소재 한국정부 투자금융관 역임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 석사

현 플라워마운드 교회 전도·선교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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