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회와 수도원 개혁을 이끈 클뤼니, 시토 수도원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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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Kim의 재미있는 교회사 이야기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 마뉴의 시대는 결국 이후 폭력과 부패 등으로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교황제도가 시작됐지만 성직이 매매되고 권력의 욕심을 채우는 자들로 인해 교회는 부패와 타락에 빠지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성직자들도 마치 중세 봉건 영주들처럼 재산과 토지로 인해 물질의 유혹 가운데 자유롭지 못했다.
중세의 봉건 영주제도는 왕이나 영주들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직자들을 임명하며 자신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재산과 토지를 수여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막대한 부를 갖게 됐고, 국가로부터 여러 정치적 특권과 세금이 면제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지역의 재판권까지 갖게 됐다.
이렇게 교회와 수도원들이 봉건 영주화 돼가며 교회의 세속화는 날이 갈수록 심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봉건 영주제도하에서 성직자의 규율과 도덕은 점차 해이해졌고, 신앙생활의 수준은 점차 하락하게 됐다.
수도원들도 마찬가지로 개혁이 필요했다. 베네딕트의 ‘규율집’이 무시되고, 수도원이 귀족들과 당시 주교들에 의해 사유화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당시의 상황 속에서 순수한 신앙의 열망을 가진 자들로 개혁을 꿈꾸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909년 아키텐의 공작 윌리엄 3세는 개혁의 열망을 안고 클뤼니에 작은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곳에서 바로 중세 교회와 수도원의 거대한 개혁이 시작됐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 일체의 권리를 포기하고 세속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는 수도원의 원장으로 베르노를 초빙했는데, 베르노는 그 때로부터 수도원이 다시 베네딕트의 ‘규율집’에 충실할 것과 엄격한 수도생활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수도원의 전반적인 개혁이 시작됐고, 그는 특히 수도원이 부패한 교황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했다.
클뤼니 수도원은 베르노 이후에도 오도, 아이마드, 마이욜, 오딜로, 휴, 피터 등의 영적 이상을 가진 유능한 수도원장들이 지도함으로 수도원 개혁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후에 클뤼니 수도원장들의 지도에 따라 이후 다른 수 백여개의 수도원들이 개혁이 진척되자, 그들은 점차 교회 전체를 개혁하고자 했다.
당시 교황들과 주교들은 수시로 교체됐고, 스스로 재산과 토지를 관할하는 봉건 영주가 돼 갖가지 부패, 음모와 획책에 휘말리게 됐다. 하지만 클뤼니는 이러한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교회와 수도원의 개혁이라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시도했던 것은 먼저 교회 지도자들이 국왕이나 귀족들, 즉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황제, 왕, 귀족들에 의해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임명되므로 세속 통치자들에 의해 교회와 수도원들이 막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성직매매는 가장 시급한 부패의 모습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클뤼니 수도원도 수세기 동안 축적된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물질이 교회와 수도원 개혁의 방해물이 됐다.
이러한 클뤼니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시작한 시토 수도원으로 점차 개혁운동의 촛대가 옮겨지게 됐다.
시토 수도원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은 베르나르였다. 그를 따르는 수도사들이 점차 늘어나자 그는 클레보르에 새 공동체를 세웠고, 이 공동체는 개혁의 중심지가 됐다.
그는 덕망있는 수도사이자 뛰어난 설교가였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가 꿀처럼 달았다고 해 ‘닥터 멜리플루우스’라 불렀다고 한다.
그는 단순히 수도원이 수도사들 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수도원의 목적이라 여겼다. 그래서 누구든지 수도사가 되고자 한다면 일정한 훈련과정을 통해 이를 허락했다.
특히,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묵상에 사로잡혀 그가 작곡한 ‘오 거룩하신 주님’, ‘구주를 생각만 해도’라는 찬송이 지금까지 불려 질 정도였다. 그는 갈수록 명성이 높아지자 종교 문제 뿐만이 아니고 정치적 문제에도 중재자의 역할을 맡을 정도로 당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특히, 그의 수도사들 중 한 사람이었던 에우게니우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그는 교황직에 대한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에게 보내는 등 그의 영향력은 교황청 위에 있다고 할 정도였다.
교황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해 알피바 이단을 대항해 설교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을 하도록 설득하게 하는 특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교회와 수도원을 개혁을 이끌어 낸 영적인 설교가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앙적으로 칭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앙됐고, 교황 비오 8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다니엘 김
한국정부 국책금융기관 여신심사 및 신용평가역
Financial Consultant
LA 소재 한국정부 투자금융관 역임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 석사
현 플라워마운드 교회 전도·선교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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