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요셉을 통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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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길 목사의 신앙칼럼 

 

우리가 고난과 역경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성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요셉이다. 요셉은 역경을 극복하고 크게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또 고난의 과정으로 인해 예수님을 예표(豫表)하는 인물로도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결과만 놓고 보자면 요셉의 삶은 두 말 할 것 없이 성공한 삶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겪어야 했던 요셉의 모든 고난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정말 억울한 고난이었다.
아버지가 형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해 미움을 받았고, 말 한 마디 잘못했다는 이유로 형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급기야 형들에 의해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운 좋게(?) 목숨을 건졌지만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됐다.
또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들어온 후에는 열심히 일해서 주인의 인정을 받아 좀 편해지나 했더니 사모님의 모함으로 성추행범이란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시작했다.
 
생각해보자. 아버지가 요셉을 특별히 사랑한 게 요셉의 잘못인가. 아니다. 편애는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이다. 요셉은 그저 사랑받게 행동했을 뿐이다. 요셉은 잘못된 부모의 편애로 인해 오히려 희생자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어린 소년이 꿈을 꿨는데 그 내용이 하도 신기해서 형들에게 말한 것이 노예로 팔려갈 만큼 큰 잘못인가? 절대 아니다.
가뜩이나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는 상황에서 요셉의 그런 눈치 없는 말들이 재수가 없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갈 만큼의 큰 죄는 결코 아니다.
또, 성추행 사건도 보디발의 아내가 혼자 짝사랑하다 거절당하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치사하게 권력을 이용해 누명을 씌운 것이지 요셉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 마디로, 요셉에게 일어난 모든 고난은 인간적으로 정말 죽을 만큼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었다. 만약 요즘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청와대 신문고에 올라가거나, 인터넷에 최소 댓글 3,000개는 달릴 법한 억울한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이 모든 사건을 ‘억울함’의 시각에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요셉의 속마음은 엄청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성경은 요셉의 속마음에 대해, 그의 불평과 원망에 대해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그 모든 사건을 하나의 ‘과정’으로만 여겨지도록 글을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 창세기의 끝에서 형들과의 해후를 통해 요셉이 겪었던 그 모든 사건과 시간들은 비로소 해석된다. 형들을 다시 만난 요셉이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성경은 요셉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세 가지 대답을 던져준다.
첫째는 고난은 끝이 아닌 과정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고, 마지막 세번째는 그렇기에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은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 때로는 그 고통이 너무 크고,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이런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라며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있던 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고난 속에서 우리를 빚어가신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삶의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실패도 의미가 있고 고통도 의미가 있다. 억울하게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고, 억울하게 세월을 소망없이 살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각본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막상 그 고난을 당할 때는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천사가 와서 “요셉아, 이게 다 총리 대신이 되기 위한 절차다. 넌 30살에 애굽에 총리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으니 힘들더라도 그 때까지만 참아라” 하고 한 마디 말만 해줬어도 ‘요셉이 얼마나 힘이 났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 말을 해주면 믿음이 없어진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마음에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믿음이라는 것이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짠~하고 생기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믿음은 그렇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경험으로 생기는 것이다. 내 삶의 경험을 통해 하나하나 확인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실존적이다. 추상적 개념이나, 허황된 신념이 아닌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어지고, 확인되어지는 실제적인 사건의 집합체인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믿음이 불확실하고 허황된 것이라 말하겠지만, 사실 믿음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그리고 고난은, 그런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그렇기에 몰라야 한다.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어떻게 해야 이 괴로운 시간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야 한다.
그렇게 몰라야 겸손할 수 있다. 몰라야 더 기도하고, 몰라야 더 간절해지고, 몰라야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 있다. 미리 정답을 알려준다면 인간은 100%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다.
 
고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고난이 없는 삶은 없다. 모든 삶은 필연적으로 고난과 더불어 살아가게 돼 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형태이며 과정이다.  

성경은 요셉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과 동행하며, 고난 가운데 기뻐하며,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라고. 이것이 우리네 인생이라고…

 

김명길 목사
현 웨슬리 교회 부목사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과정
감리교 신학대학교 목회학 석사
건국대학교 히브리학과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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