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왜 다비다가 아닌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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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길 목사의 신앙칼럼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린 사건이 등장한다. 욥바라는 곳에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는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살았는데, 어느날 병에 걸려 죽게 된다. 때마침 사람들이 근처에 있던 베드로를 데려왔고, 그는 죽은 다비다를 살려냈다.
그 후 베드로가 욥바에 며칠 더 머물게 되는데 여기서 베드로가 머문 집이 어디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9장 마지막 절인 43절을 보면 베드로는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다고 나온다.

무두장이는 죽은 짐승의 가죽을 다루고 가공하는 직업을 말한다. 죽은 짐승 가죽을 벗겨 천막같은 생활용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당시 율법은 죽은 짐승을 다루고 만지는 일을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 직업 역시 부정한 일로 간주됐다.
또한 가죽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악취가 심하고 폐수가 많이 나왔다. 이런 이유들로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업이 무두장이였다.
미쉬나에 따르면 무두장이를 남편으로 둔 여자는 그 이유만으로도 언제든지 이혼이 허락됐다. 그런 무두장이의 집에 베드로가 머물었던 것이다.

그럼 한 번 생각해보자. 베드로가 욥바에서 더 머물게 된다면 어디에 있어야 할까? 다비다의 집에 있어야 맞다. 다비다 입장에서 베드로는 죽은 자신을 살려준 사람이다.
그런 베드로가 자신의 동네에 며칠 더 머물러야 될 상황이 됐는데 다비다가 가만히 있었겠나. 제발 자기 집에 머물러 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게다가 다비다는 꽤 부자였다. 39절을 보면 다비다가 죽었을 때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당시 입었던 겉옷은 낮에는 옷으로 입고 밤에는 이불 대신 사용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또, 햇볕이 강한 사막지역이라 햇볕을 가리는 용도로도 사용됐다. 따라서 겉옷을 지으려면 천이 많이 필요했고 돈이 많이 들어갔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힘든 과부들을 위해 다비다가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줬던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다비다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베드로가 편하게 머물기엔 다비다의 집이 적격이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비다의 집이 아닌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편하게 쉴 수 있는 다비다의 집을 놔두고 냄새나고 불편한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을까. 나는 이 장면이 사도행전이 강조하고자 하는 중요한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두장이는 천대받는 직업이다. 따라서 시몬은 사람들과 접촉할 일이 거의 없었다. 가난했고, 천대 받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성경에서 시몬이 등장하는 시점도 사실 좀 쌩뚱맞다. 시몬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의 마지막에 뜬금없이 등장한다.
평소에 선행과 구제에 힘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았던 사람,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누가 봐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비다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끝에 뜬금없이 시몬이 등장한다. 그것도 달랑 한 절. 뭐 하나 다비다와 비교했을 때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은 커녕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다비다와 달리 시몬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시몬은 철저히 엑스트라다. 사실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된다.
성경을 읽는 우리도 그렇지 않나. 아마도 대부분 이 이야기에서 시몬을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들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한 다비다, 죽었다 살아난 다비다는 알고 있어도 무두장이 시몬은 잘 몰랐을 것이다.
이 스토리에서 누구도 시몬을 주목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사람들도 그랬고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도 그렇고 시몬은 철저히 관심 밖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몬을 베드로는 주목했고 그의 집에 찾아가 거기서 머물렀다. 그리고 이 행동을 통해 베드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자신이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줬다.

43절에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집에서’ 라는 단어가 없다. ‘파라’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곁에, 옆에’란 뜻이다. 다시 말해, ‘무두장이의 곁에 머무니라’가 정확한 번역이다.
그리고 이 ‘파라’는 성령을 가리키는 단어인 ‘파라클레토스’에도 담겨 있다. ‘파라’는 ‘곁에서’, ‘클레토스’는 ‘위로하다, 격려하다’는 의미다. 우리 곁에서 위로하시는 분, 격려하시는 분. 이것이 보혜사 성령의 의미다.

성령께서 우리 옆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듯이,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 역시 시몬을 찾아가 그의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하고 돌봐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다비다에게 주목하고 그녀에게 몰려갔을 때, 베드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몬에게 찾아가 그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줬다.
그가 전하고자 애썼던 복음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시몬에게는 베드로의 그런 행동이 진짜 복음이었다.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가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보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고, 함께 있어준 것이 그에게는 복음이었던 것이다.

흔히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귀신이 떠나가는 등 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날 때 사람들은 그 현상에 주목하기 쉽다.
마치 그런 현상만이 참된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으면 우르르 몰려간다. 어떤 특별한 기적을 보기 원한다.
그리고 마치 그것만이 성령 충만한 것이고, 그것만이 성령이 임재하는 것이고, 복음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머물 곳으로 시몬의 집을 선택하고 그곳에서 시몬과 며칠을 보냄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그곳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와 임재가 동일하게 그곳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병이 낫거나 기적이 일어나진 않지만 가난하고 외로운 자에게 다가가는 것,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해주는 것 역시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성령이 하시는 일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모습이라고 사도행전은 베드로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명길 목사
현 웨슬리 교회 부목사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과정
감리교 신학대학교 목회학 석사
건국대학교 히브리학과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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