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초더미 기도운동과 미국 학생 선교운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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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영 목사의 ‘부흥을 사모하며’ 

 

19세기 들어와 세계선교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사건(기도모임)이 일어났다. 사무엘 밀즈를 중심으로 뉴잉글랜드 윌리암스 대학에서 일어났던 건초더미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도회를 계기로 미국의 학생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해외 선교의 불이 타올랐으며, 그 결과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복음이 활발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사무엘 밀즈 Jr. (Samuel Mills Jr. 1783-1818)
건초더미 기도운동의 중심인물 사무엘 밀즈는 예일대학 출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무엘 밀즈 목사는 코네티컷 주 부흥운동 지도자 중 한분이었고, 경건한 그의 어머니는 어린 밀즈를 선교사역에 써 달라며 하나님께 바쳤다.
당시 미국교회는 인디언 선교를 하고 있었지만 해외선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해외선교부 같은 선교기관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그 어머니의 헌신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밀즈는 17세 때 부흥운동을 통해 큰 은혜를 체험하고 스스로 세계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이날 이후 세계선교는 그의 평생에 흔들림 없는 목표가 됐다.
23세가 되던 1806년, 밀즈는 예일이나 하버드 보다 등록금이 싼 윌리암스 칼리지에 입학한다. 그는 윌리암스 마을과 대학 안에 영적 부흥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을 갖고 대학 안에서 복음과 부흥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밀즈와 밀즈그룹이라고 불린 그의 친구들은 매주 정기적으로 모였고, 정기 모임 외에도 자주 따로 모여 학생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회를 가졌다.

건초더미 기도회 (Haystack Prayer Meeting)
그러던 중 1808년 8월 어느 무더운 토요일, 밀즈 그룹 학생 다섯 명이 기도하기 위해 Hoosic 강변에 모였다. 이 때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소나기가 쏟아지자 이들은 소나기와 천둥을 피해 근처 건초더미 속으로 피해 그곳에서 비가 그치기까지 아시아 선교에 대해 나누며  뜨겁게 기도한다.
그 때 성령께서 그곳에 강하게 임하셨다. 밀즈는 “우리가 아무리 해외선교를 위해 기도할지라도 우리 자신이 해외 선교사로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 기도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상기시키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We can do this, if we will!”이라고 도전했다.
이 구호는 이후 건초더미 기도운동의 슬로건이 되었다. 이 기도모임은 그해 여름 내내 그 숲속에서 계속 되었고, 겨울이 다가오자 기도회 장소를 어느 부인의 집으로 옮겨 계속하다가 다시 숲속에서 1807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이 작은 기도모임이 미국의 대학에서 일어난 최초의 해외선교를 위한 기도회였다.  이처럼 선교에 헌신되고 기도하는 소수의 젊은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펼쳐나가시게 된다.

건초더미 기도회의 열매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라도, 언제든지 가겠다고 다짐하고 북미주 최초의 해외 복음전파를 위한 결사대 같은 ‘The Society of Brethren’(형제회)를 조직한다.
그들 5명은 윌리암스대학을 졸업한 후에 주변 신학교와 예일, 프린스턴, 하바드 대학으로 재입학해서 세계선교를 위한 기도모임을 만들고 세계선교 헌신자들을 확보해 나가면서 선교 정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2. 그들이 1810년 6월에 열린 교단 총회를 찾아가 자신들을 해외선교사로 파송해주기를 요청하며,1810년 미국 최초로 해외선교회가 탄생한다.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미국 해외 선교회)이 만들어진 2년 후 건초더미 기도회원 3명과 아도람 저드슨 등 5명을 인도로 파송한다.
ABCFM(미국해외선교회) 를 통해서 이후 50년간 1,250명의 선교사가 미국에서 해외로 파송됐다.
한편, 사무엘 밀즈는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오랫동안 준비해 왔으나 미국 해외 선교회 요청으로 선교사로 안수받는 대신 미국에 남아 선교사 파송과 지원, 선교에 관한 정보제공과 선교사 후보생 교육을 하고, 미국 오지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했다.
3. 사무엘 밀즈의 영향과 도전으로 1816년에 미국성서공회가 조직되어 국내와 해외에 많은 성경을 보급하게 된다. 사무엘 밀즈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온 생애를 불태웠다.
그는 형제회(The Society of Brethren)를 만들 때 대학간의 연합 선교회를 결성하는 꿈을 꾸었는데 약 70년 후 헐몬산 수련회를 통해서 그것이 이루어진다.

4. 건초더미 기도회가 시작되고 61년 후인 1867년, 기도회 자리에 건초더미 기도회 기념비가 세워지고 이 기도운동은 학생자원 선교운동(SVM)으로 연결된다. 기도회를 기념해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세계에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1879년, 프린스턴 대학 YMCA 지도책임자인 루터 위셔드는 윌리암스 대학 YMCA 회장인 찰스 오버를 만나 건초더미 기도회 기념비를 찾아갔다.
눈 덮힌 기념비 앞에 꿇어 앉아 자신들도 그들 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디든지, 언제든지, 어떤 일도 하겠습니다”라고 헌신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집회를 인도해 유명한 케임브리지 7인을 선교사로 헌신시킨 DL 무디를 강사로 모시고 헐몬산 대학생 연합 사경회를 준비한다.
루터 위샤드와 찰스 오버는 이를 위해 여러 대학을 찾아가 89개 대학에서 251명을 학생대표들을 이 사경회에 참석시켰다. 헐몬산 대학생 연합 사경회에서 100명의 참가자들이 선교사 헌신을 하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게 될 학생자원 선교운동(SVM)이 태동하게 된다.
이 학생자원 선교운동을 통해 50년간 20,500명의 선교사들이 해외로 나가게 됨으로 선교의 황금기가 열리게 된다. 이 학생자원선 교운동을 통해서 선교사로 헌신한 젊은이들이 초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주님, 오늘날 미국의 대학마다 사무엘 밀즈 같은 젊은이들을 세우셔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모임들이 불길 처럼 일어나게 하소서. 특별히 교회의 대학 청년부들과 대학생 전문 선교단체들 안에서 부흥을 위한 기도가 타오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이 땅에 학생자원 선교운동 같은 선교운동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 주님의 지상명령이 힘 있게 성취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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