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효 이벤트] 늦기전에 아버지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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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또 급히 전화를 끊으셨다.

이역만리 바다건너 사는 딸이 오랜만에 건 전화였다. 

“응, 난 잘 있다. 거긴 다 괜찮지? 코로나 별탈 없고? 정서방이랑 겸이 잘 있지? 난 밥 먹었다. 마스크는 많이 있냐?”

두서 없는 몇 마디를 나누다가 아버지는 당신의 질문이 끝나고 원하는 대답이 나오면 더 듣지도 않으시고 툭, 그렇게 전화를 끊으신다. 

나는 아직 안녕히 계시란 인사도 못했는데…

아버지와의 짧은 통화는 마저 묻지 못한 안부와 인사들로 오래도록 먹먹한 여운이 남곤 했다.

아버지의 발음이 언젠가부터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한번 물은 질문을 다시 하시기도 했고 손자의 얘기를 잘못 듣고 엉뚱한 대답을 하시기도 했다.

아버지의 건강과 기억에 대한 걱정은 통화 후에는 더욱 내 마음을 무겁게 했고, 아버지는 당신의 쇠락함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 스스로 민망하신듯 했다.

서로의 말이 어긋나는 몇 번의 상황을 겪은 후, 가뜩이나 길지 않은 통화인데도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서둘러 전화를 끊으셨다. 

아버지는 명민하고 재주가 많으셨다. 가난한 집안에 재주많은 둘째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그 옛날 많은 시골 출신의 자식들이 그러하듯 마치지 못한 배움은 한이었지만 그것을 핑계로 패배자로 남지는 않으셨다. 

하고 싶은 것들은 접었고 대신 해야 할 일들을 찾아내 어떻게든 당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가족들을 부양했다. 

글재주와 손재주가 뛰어났던 아버지는 소소하게나마 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지를 혼자 기획하고 편집하시거나 직접 나무공예로 멋들어진 장식장을 만들어 내기도 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책장에서 박노해를 알았고 멜빌을 읽었다.

시골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실 때 거기 있는 옛날 공문서는 다 아버지 필적이라 할만큼 펜글씨는 물론이고 붓글씨 솜씨도 뛰어나셨는데, 학교에서 가훈 액자를 가져오라는 과제가 떨어지면 몇몇 이웃들은 우리집을 찾아와 아버지께 붓글씨 가훈을 부탁하곤 했다. 등교길에 누군가가 아버지의 익숙한 서체와 낙관이 담긴 액자를 들고가는 것을 보며 어린 어깨는 절로 으쓱했었다.

딸들이 전라도 골짜기에서 주저앉을 것을 염려하며 자신이 달지 못한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경기도 땅으로 올라와, 성실하고 묵묵한, 아주 보통이지만 그래서 정말 하기 힘든 가장의 모습을 사신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드라마에 나오는 이상적이고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옛날 아버지답게 깐깐하고 융통성도 없으며 보수적인 분이셨다.

다정한 말 한마디보다 일단 버럭 질러대는 거친 성격은 어머니께도 우리에게도 아버지와의 거리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사랑, 아버지는 그것을 아버지다운 것이라 여겼겠지만 어린시절 우리 세 딸과 어머니는 그 잔정없이 살찬 아버지가 참 많이도 서운했다.

그래도 나의 기억 속 아버지는 굳건하고 강했다.

그랬다. 강했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가 점점 늙어간다. 아버지가 붙잡고 있던 많은 것들은 양파망의 모래처럼 시나브로 새어나가고 있었고 그것은 눈으로 보여졌다. 

처음엔 움직임이 둔해졌고 다음은 말이 엇나갔다.

운전은 위험해 하실 수 없게 되었고 걸음은 위태해져갔다. 단단해 보였던 어깨는 자꾸 굽는다. 팔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사소한데서 고집들을 꺾지 않고 꼬장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노인’으로서의 아버지의 낯선 모습이 자꾸 생겨났다. 

아버지의 키는 자꾸 줄어간다. 그 키를 빼서 손자에게 주시는 모양이다. 띠동갑 손자는 무럭무럭 커가는데 아버지는 조금씩 작아지고 어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늙어감은 구멍이 생긴 댐처럼 걷잡을 수 없이 아버지를 무너뜨렸다.

몸이 늙어가며 마음도 약해진 아버지, 그 옆에 있지 못하는 딸은 내 아름졌던 나무가 말라가는 것을 멀리서 짐작만 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아버지는 마음이 약해졌을 뿐이지 갑자기 다정한 사람이 되어주진 못했다.

미국에 들어오기 전 아버지는 노상 그 무심한 태도로 “잘 살어라, 건강하고..”라며 내 등을 툭 툭 두어번 쓸어내리고는 손자 손에 지폐 몇 장을 쥐어주신 것이 다였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행동이었음을, 아버지 딸인 나는 잘 안다.

이 잔인한 시절은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2년간 전화로만 안부를 묻게 했다. 

전파를 통해 화면이나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는 그마저도 종종 매끄럽지 않아 내가 부모님과 얼마나 멀리 있는지만 더욱 절절히 체감할 따름이었다. 

하긴, 내가 한국에 있어도 과연 우리 부녀는 얼마나 많은 대화를 했을까. 하지만 대화 대신에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청주를 사들고 입맛 다실만한 안주거리를 챙겨 갔을테고 아버지는 얼마전 거둬들인 감자 중 제일 흠없고 예쁜 놈들을 골라 내 몫으로 담아뒀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부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애정 표현이었을 테니까.

아버지와의 대화가 쉽지 않아지면서 걱정이 생긴다. 보지 않으니 말로라도 맘이 전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운하도록 무뚝뚝하고 사날없던 나의 아버지, 아버지를 너무도 닮아서 무뚝뚝하고 살갑지 못한 딸, 이런 부녀가 미처 나누지 못한 말들이 화석처럼 쌓이고 쌓여 돌이 될까봐, 끝내 돌처럼 무거운 후회로 가라앉아 가슴을 누를까봐, 나는 이렇게 멀리 있는데 내가 놓치고 있는 시간과 기회들이 영영 사라질까봐 자꾸 조바심이 난다.

그러면서도 내 못난 부끄러움은 결국 내 입을 막고 만다. 아버지에게 부끄러울게 뭐 있어, 하다가도 금세 찾아온 쑥쓰러움과 어색함, 그 어딘가에 내 못한 말들은 묻혀 버리고 만다. 그래서 어쩌면 이 글은 나에게 쓰는 다짐 같은 것이다. 

나는 안다. 아버지에게 긴 말들은 필요 없다. 따뜻한 청주같은, 동그랗고 예쁜 알감자같은 그런 말 몇 마디면 된다. 자식의 삶에 거름이 되신 존경스런 나의 아버지… 이 글의 마침표 끝에 아버지께 마음을 전할 용기가 시작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아빠, 딸이 얼마나 아빠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알지? 나 한국갈 때까지 건강하게 계셔야해요! 아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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