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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그리움을 삭이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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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37회 작성일 24-03-1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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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파친코’ 시즌1에서 주인공 선자는 어머니와 함께 자기 하숙집에 손님으로 왔던 전도사 이삭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랑해서 한수의 아이를 임신해 미혼모가 될 처지에 놓인 선자의 사연을 우연히 듣게 된 이삭은 그녀에게 청혼하고, 목사님의 기도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선자는 이삭과 함께 어머니와 정든 고향을 떠나 일본 이쿠노쿠에 있는 형 요셉의 집에서 살게 된다. 

어느 날, 몸이 무거운 선자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형님이 선자의 빨래를 해 널고 있었다. 고향의 냄새가 담긴 옷으로 그리움을 달래던 선자는 옷을 빨아서 냄새가 다 없어졌다며 서럽게 운다.

선자가 형님에게 이렇게 아린 게 언제쯤 끝나게 되냐고 묻자, 참는 법을 배우게 될 거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움은 사라지거나 끝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꾹꾹 눌러 참는 법을 익혀가는 거였다. 노력해도 통제되지 않는 게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이국에서 그리움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두 여인의 삶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선자의 아림이 내 아픔으로 다가왔다. 

딸 친구 중에 고향이 인디아인 아이가 있다. 그 친구가 보낸 사진을 보고 뭉클했던 적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을 실제로 보아서인지 잊히지 않는다.

사진 속엔 자주색 블라우스가 벽에 걸려있었다. 옷에 초점이 맞춰진 사진이라 방안에 놓인 살림이 선명하게 부각되진 않았으나, 부유해 보이진 않았다. 그 친구의 엄마는 돌아가셨다. 아빠는 엄마가 즐겨 입던 블라우스를 일 년째 벽에 걸어 놓고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런데 홍수가 났다. 천장에서 비가 새는 바람에 옷이 젖어서 어쩔 수 없이 빨게 되었는데, 엄마 냄새가 사라져서 아빠가 슬퍼한다는 사연을 사진과 함께 전해왔던 것이다.

죽은 아내의 옷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살아있는 아내를 두고도 바람을 피우거나,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 남편이 있다는 혼탁한 세상에 살다 보니 아내 냄새가 사라진 옷을 끌어안고 우는 남편이 인간문화재처럼 느껴진 건 지도 모르겠다. 

친정어머니가 48살의 짧은 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라는 표현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체험했었다.

부지런했던 어머니는 빨랫줄에 널어 둔 빨래를 밤이슬이 내리도록 걷지 못했고, 늦둥이 아들이 걱정되어 눈을 뜬 채 숨을 거뒀다. 동네 어른들이 엄마가 쓰던 옷가지와 물건을 태우라고 하셨다. 그래야 훌훌 편히 갈 수 있다고.

장의사 소각장에서 태워 준다고 하여 챙겨다 주긴 했지만, 다 주진 못했다. 나 역시 엄마의 옷을 빨지 않은 채 오랫동안 끌어안고 살았다. 엄마 냄새는 그리움을 달래고 삭이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누구나 가슴 속에 그리움이란 우물을 묻고 산다. 때로는 퍼 담고, 때로는 퍼 올리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리움의 수위를 조절하며 사는 거다.

부재나 상실에서 오는 그리움은 인력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애써 누르고 또 누르며 삭여야 한다. 그래서 때론 망각이라는 기능이 감사하다. 상실의 아픔을 매순간 기억한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사진을 보고, 누군가는 추억하고, 누군가는 유품을 어루만지고, 누군가는 옷에 남은 체취를 맡으며 숨통을 연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지인은 마음이 힘들거나 그리울 때면 아침 일찍 남편 산소에 들러 푸념을 늘어놓곤 한다. 나 혼자 놔두고 거기 편히 누워 있으니 좋냐고 통박을 주고, 속풀이도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와 하루를 시작한다. 

 

심성보 시인은 그의 시 「그리움이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리움이란

누군가에겐 행복의 사랑으로 다가오는 기쁨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떠난 사람 뒤에 오는

슬픔의 얼굴을 가진

차가운 비수 같은 것일 테지”라고. 

 

내 그리움은 어느 쪽일까? 이 세상 어딘 가에 내가 그리워서 그리움을 삭이는 이가 있을까? 근간 여러 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마다 삶과 죽음, 인연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눈을 뜨면 떠오르는 그리운 사람들, 차마 떼어내지 못해 끌어안고 산다.

그리움이란, 고통이기도 하지만, 산 자가 누리는 축복이기도 하다. 어쩌면 삭이지 않아도 좋을 그리움이 나를 살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리움이라면 끌어안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워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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