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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우리들의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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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195회 작성일 25-12-0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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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희 시인 / 수필가


 세월이 흐르면 시간은 더 빠르게 달아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을 기다리던 그 세 달은 학창시절 수학여행 전날처럼 더디고 길었다. 달력을 넘길 때마다 종이 한 장이 아니라 설렘 한 겹이 벗겨져 나가는 듯했고, 비행기표를 예약하던 날의 두근거림은 오래된 일상에 조용히 스며드는 단비 같았다. 가끔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새어 나왔고, 그러다 남편에게 들켜 “그렇게 좋아?”라는 질문을 받곤 했다. 나는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응, 좋아. 좋은 사람들과 2박 3일을 함께 움직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내 마음이 꽤 오래전부터 여행 가방을 꾸리고 있었음을 알았다.


  아홉 명.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숫자. 그럼에도 시간 맞추기부터 결정까지 모든 것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이 정도면 전생에 우리가  같은 절에서 같은 스님 밥을 먹으며 인연을 쌓았다고 해도 믿을 만큼이었다. 부득이한 이유로 한 명이 빠지게 되었을 때 모두 아쉬워했지만, 그 사정이 너무 좋은 소식이라 마음 한편이 오히려 따뜻해졌다.


  여행의 문은 캐피털 원 VIP 라운지에서 열렸다. 스푼을 부딪히는 소리, 커피 향, 서로의 달뜬 목소리. 그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오래 기다린 ‘수학여행생’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다시 밟은 라스베이거스는 예전의 화려함을 잃고 묘하게 헐렁해져 있었다. 아니 어쩜 숨을 고르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낮에 호텔 창밖으로 내려다본 도시는 예전보다 한 톤 낮은 조명 아래 놓인 듯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이상하게 세월의 그림자를 보았다. 세상도, 도시도, 우리도 변하는 것. 아마 여행이란 그것을 받아들이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짐을 풀고 스피어 공연장으로 향했다. 멀리서 본 둥근 외형은 거대한 구슬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서니 묘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구를 통과하는 순간, 현실이 아주 얇은 막처럼 흔들렸다. 돔 안은 하나의 새로운 행성이었고,

그곳은 우리가 잠깐 빌려 쓰는 우주의 일부 같았다. 내부에 펼쳐진 돔 스크린은 말 그대로 또 하나의 세계였다. 그날의 공연은 오즈의 마법사였다. 좌석이 흔들리고 바람이 스치고 소리가 온몸에 닿을 때, 우리는 어느새 도로시와 같은 속도로 회오리에 휘말리고 있었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 잠시 비켜나 있는 듯한 동화 속 시간이었다.


  ‘수학여행’이라는 말은 때로 순수한 추억을 흔들어놓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비롯된 근대적 교육 프로그램, 학생들에게 강대국을 선망하도록 강요하던 시대의 흔적.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비극 이후, ‘수학여행’이라는 단어는 웃음과 아픔이 함께 떠오르는 단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 여행을 수학여행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목적지도, 일정도, 박수받을 화려한 계획도 중요하지 않은 여행. 오직 함께 있는 사람들이 여행의 전부가 되는 시간. 어른이 되어 다시 떠나는 수학여행은 그래서 더 진했다. 라스베이거스를 세 번째 찾았지만, 나는 아직 블랙잭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재운이라 불릴 만한 것이 없는 나는 복권 한 장도 사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조금 따와보라”는 남편의 농담이 신기하게 용기를 만들어냈다. 버펄로 슬롯머신 앞에 앉자 친구가 먼저 돈을 쑥 밀어 넣어주었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게 참 어이가 없으면서도 묘하게 빠져들었다.


그때 다른 쪽에서 놀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 게 터졌어! 빨리 와!” 달려가 보니, 화면 가득 폭죽 같은 그래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 ‘빵’ 터진 것이었다. 웃음과 환호, 친구가 현금과 함께 세금보고 고지서를 들고 서 있던 그 얼굴은 이 도시가 왜 사람을 유혹하는지 단박에 이해하게 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나는 숫자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는 화면을 새벽까지 바라보다가 결국 지쳐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출구가 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눈은 시렸고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차 안에서 눈을 붙여보려 했지만 웃음소리가 잠을 밀어냈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조합.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여덟 명.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차 안에는 한순간도 웃음이 비지 않았다. 서로 다른 성격, 다른 생활, 다른 속도를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한 차 안에서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내며 웃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뭉클했다. 서로의 엉뚱한 말투, 불현듯 터지는 농담, 사소한 풍경에 감탄하는 목소리들. 아마 이것이 나이 든 우리들의 수학여행이었다. 목적지보다 함께하는 얼굴들이 더 선명히 남는 여행. 낯선 도시보다 서로의 온기가 더 깊게 기억되는 시간.


  우리는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이 떠나는 여행은 때때로 젊은 시절보다 더 선명하고 더 따뜻하다. 웃음 또한 더 가볍고 자유롭다. 왜냐하면 이제는 안다. 무엇을 위해 떠나는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떠나느냐가 전부라는 것을.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하루가, 때로는 삶 전체를 비춰주는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수학여행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도시는 예전 같지 않았고, 밤은 조금 지쳐 있었지만, 여행의 핵심은 언제나 사람이고, 사람은 결국 서로에게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어쩌면 우리가 떠나온 것은 라스베이거스가 아니라, 오랫동안 장롱 깊이 넣어두었던 우리 안의 장난기와 긴장감과 생기 그리고 잊고 있던 우리 안의 웃음과 설렘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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