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바다를 꿈꾸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591회 작성일 23-10-27 11:02

본문

  내일 아침에 히터를 점검하는 기사가 오기로 했다. 

영어로 대화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답답하다. 이놈의 영어 울렁증을 언제나 벗어날까. 요새는 달라스 지역에 한국 음식점이 다양하게 들어서고 한인 커뮤니티도 많이 생겨 생활이 편리해졌지만, 영어 쓸 일이 더 없어지니 실력이 영 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미국 땅이니 피하려 해도 이처럼 영어와 맞닥뜨리는 순간이 온다. 역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나 보다. 

17년 전에 미국 텍사스로 이주했다. 처음 몇 달은 적응하느라 몰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낭패감이 들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으니 해야 할 일도 많았는데, 말하는 것은 둘째 치고 우선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치로 어림잡아 대화한다 해도 아이들 선생님을 마주하거나 관공서에서 일을 볼 때 엉터리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졸업 후 다녔던 회사에서도 영어를 했지만, 현지인과 대화하기엔 아주 부족했다. 틀리더라도 자꾸 해야 하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문법이 틀리면 상대는 기다려 주는데도 스스로 주눅이 들어 말이 엉켜 버렸다. 그런 일을 몇 번 겪으면서 말하는 것을 점점 더 꺼리게 되었다. 

아이들 농구팀이 연습할 때나 학교 오케스트라 학부모 모임에 가면 미국 부모들이 말을 시킬까 봐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말 하나는 막힘없이 하며 사람들과 유쾌하게 지내왔기에 여기서도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대화 도중에 실수하여 어색해지는 것을 피하려다 보니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말하지 못하면 소통에 한계가 생기고, 소통이 되지 않으면 관계가 깊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미국 사회로 뻗어 나가지 못하고 한인 사회에만 머물게 되었다. ‘정중지와 부지대해 (井中之蛙 不知大海),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해도 알지 못한다.’라는 장자의 말처럼 스스로 땅을 파고 돌을 쌓아 만든 우물에 갇혀서 그 작은 세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너른 땅 미국에서 살았지만, 실상은 미국도 한국도 아닌 내가 만든 우물 안에서 맴돌았다. 많은 인연과 기회가 넘실대는 바다가 문밖에 펼쳐져 있음을 아는데도 나갈 엄두를 내지 않았다. 영어는 그 바다를 헤쳐 나갈 돛단배였는데, 내 배는 너무 부실했다.

말을 막힘없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절실히 느낀 적이 있다. 몇 해 전 한국 방문 때의 일이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이어서 2주간의 격리를 해야 했다. 공항 근처에 원룸을 얻었는데, 작은 방에 욕실과 주방이 딸린 구조였다. 

그립던 한국 땅에 도착했지만,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가족들도 만나지 못하니 감옥이 따로 없었다. 

밥을 지어 먹고 설거지를 한 후 얼마 안 되는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바닥을 닦고 소꿉장난 같은 집안일을 다 마쳐도 시간은 남아돌았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었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른 채 시간이 흘러갔다.

며칠이 지났을까. 갑갑한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어 2월의 서늘한 공기를 방 안에 들여놓았다. 

창밖엔 겨우내 마른 풀이 군데군데 버티고 있는 널따란 노지가 있었고 그 너머로 3, 4층 높이의 또 다른 원룸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몇몇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00 세탁소, 00 마트, 00 칼국수…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 속을 훑고 지나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커튼을 날리며 불어 드는 찬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깥세상에 한글이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선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있었다. 마주치는 누구와도 예의를 갖추어 대화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내게 호의를 가지는지 혹은 언짢아하는지 민감하게 느끼고 대처할 수 있었다. 적어도 말 못 해서 생기는 오해는 없었다. 단절도 열등감도 없었다. 

국가의 3대 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처럼 그 전체를 완성해 주는 것은 역시 언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는 우물 안에 갇혀야 보이는 게 있나 보다. 창 너머 한글 간판을 보는 것만으로 바깥엔 소통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내게 한글과 한국말은 언어를 넘어 관계이며 조국이었음을 깨달았다. 격리가 끝나 숙소를 나가던 날, 입구에서 기다리던 언니와 형부를 만나 유창한 한국어로 한을 풀었다. 

어디를 가나 들리는 우리말이 나를 충전해 주었다. 나에게 모국어와 조국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다. 

그렇게 받은 에너지로 미국에서 살고 있다. 여전히 우물 안에서 살고 있지만, 이제는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사랑하는 이 땅, 미국에서도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보고 싶다. 내일은 되든 안 되든 마음 먹고 영어를 해볼 참이다. 조금만 용기를 내봐야겠다.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언젠가 든든한 배를 띄울 날이 오지 않을까. 

  먼바다, 깊은 세계로 나가게 되기를 꿈꾼다.

 

백경혜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 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수소는 분자 구조상 크기가 매우 작고 지구에서 가장 가벼운 기체이기 때문에 석유나 천연가스처럼 암반 구조에…
    문화 2024-08-23 
    공인회계사 서윤교    지난 목요일 시카고에서 폐막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카멀라 해리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을 함으로써 공화당의 트럼프 전 대통령에 맞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공식적으로 확정됐다. 두 사람은 소속 정당만큼이나 경제정책이 많이 다른데 그중에서도…
    세무회계 2024-08-23 
    달라스에서 비행기로 4시간을 날아 오레곤의 주도 포트랜드에 도착할 즈음이면 창가 오른쪽으로 오레곤주와 워싱턴 주의 명산들이 눈에 들어 옵니다.하얀 눈으로 정상을 덮고 그 밑으로 길게 띠를 형성한 구름의 오묘한 조화 속에 마치 영화 ‘Frozen’을 연상할 만큼 아득한 …
    문화 2024-08-23 
    아파트나 개인주택을 렌트해서 거주하는 분들에게 필요한 보험이 세입자보험(Renter's Insurance)이다. 그런데 렌트하우스나 아파트에 거주하는 분들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에 손실이 생길 경우 랜로드가 보상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피해가…
    보험 2024-08-23 
    구독자 여러분. 오늘은 미국의 스포츠 음료 중 게토레이(Gatorade)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965년 플로리다 대학 미식 축구부에서는 더위로 인해 일사병이나 탈수로 사람들이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남자의 강인함을 생명으로 여기는 미식 …
    문화 2024-08-23 
    크루즈 여행은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여행 형태중 하나이다. 특히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미 대륙을 여행하는데 드는 자동차여행 경비와 비교를 해보면  특히 비용면에서 그렇단 생각이 든다.한 일 주일정도를 그저 그런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고, 별 세 개 짜리 숙소에서 …
    문화 2024-08-23 
    달라스에서 비행기로 4시간을 날아 오레곤의 주도 포트랜드에 도착할 즈음이면 창가 오른쪽으로 오레곤주와 워싱턴 주의 명산들이 눈에 들어 옵니다.하얀 눈으로 정상을 덮고 그 밑으로 길게 띠를 형성한 구름의 오묘한 조화 속에 마치 영화 ‘Frozen’을 연상할 만큼 아득한 …
    문화 2024-08-23 
    아름다운 꽃,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다른 표정을 가지고 한 여름에도 설산을 간직하고 있는 마운트 후드(Mount Hood)같은 아름다운 화산들,  거친 듯 잔잔하며 골짜기 마다 신비한 풍경을 간직하고 조그만 돌멩이 하나 조차 천지 자연을 이뤄나가는 오레곤 주는 자연의 모…
    문화 2024-08-16 
    명품의 나라 불란서 파리에서 진행된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우리 고국 대한민국은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종합순위 8위를 기록했다. 금메달을 참가전 예상인 5-6개를 두배 이상의 성적으로 자그마치 13개나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특별히 독일 이태리를 앞선 기록 수…
    세무회계 2024-08-16 
    파리올림픽에서 전 종목 금메달을 석권한 한국 양궁은 보는 이들을 탄복하게 했다. 관객들의 환호성과 여러 소음, 불어오는 바람, 승부가 판가름 나는 위기의 순간 극한의 긴장 속에서 선수들은 어떻게 심장 박동마저도 낮추며 평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올림픽 시즌이면…
    부동산 2024-08-16 
    위키 백과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약 33%는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은 많아도 성경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몹시 어려워 보인다.  하나님이 사람 마음속을 훤히 아신다는 부분이 가장 난감하다. 하나님은 외모 말…
    문화 2024-08-16 
    오늘은 근래에 급격하게 수요가 높아진 가정 간편식(HMR / Home Meal Replacement)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가정 간편식(이하 HMR)은 복잡한 별도의 조리 과정 없이 그대로 또는 단순 조리과정을 거쳐 섭취할 수 있도록 가공, 포장한 완전, …
    문화 2024-08-16 
    이 전 칼럼들을 통해 교통 사고를 대비하여 평상시에 준비하셔야 할 부분,  그리고 사고를 당하셨을 때 챙기셔야 할 부분들에 대해서 이야기 드렸으니 이번에는 변호사를 선임 하신 분들이라면 모두들 궁금해 하실 선임 후 진행되는 절차를 쉽게 풀어 보려고 한다.변호사를 선임한…
    법률 2024-08-16 
    대상포진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질병 중 하나입니다. 미국의 질병 관리국(CDC)에 따르면 인구 3명 중 1명이 평생 최소 한 번의 대상포진을 겪는다고 합니다. 대상포진은 심한 통증과 피부 발열, 물집을 동반하고 띠 모양을 가지며 몸의 한쪽으로만 번지는 것이…
    건강의학 2024-08-16 
    도무지 한치 앞을 알수 없는 불안정한 금융시장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듯 하다. 소비자 물가지수가 어느 정도 잡히면서 모두가 예측한대로 이제는 곧 점진적인 이자율의 하락이 예상되는듯 하다가, 또 갑자기 고용시장발 불안정한 지표들이 보이면서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이어지지 …
    세무회계 2024-08-16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