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백경혜] 너랑 사이좋게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68회 작성일 24-10-25 09:41

본문

백경혜 수필가


이상하게 한 달에 사나흘은 더 고달프고 우울했다. 


돈을 버는 것도, 마트에서 무얼 살까 결정하는 것도, 그 재료들을 다듬어 요리하고, 하루에 세 번 먹는 것을 반복하는 것도 권태로운 노동으로 여겨졌다. 가족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혼자서 많은 일을 감당하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무신경하게도 그들은 희생을 알아주지 않았고, 내 고단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아침에 눈을 뜨면 마음속 컴컴한 좌절의 방 커튼 한 자락을 젖히고 하얀 햇살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어제까지 분명 흑백이었던 것에 빛이 스며들고 사물이 조금씩 생기 있는 천연색으로 바뀌었다. 목소리는 가벼워지고 매사에 더 너그러워졌다. 가족과 치대면서 사는 게 좋아지고 뒷마당의 싱그러운 녹음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한 퇴근길, 일렁이는 노을의 물결에 감사했다. 

  

하지만, 힘든 날은 또 찾아왔다. 마치 마음에도 동틀 녘, 한낮, 해 질 녘이 있고 한 달에 사나흘은 깜깜한 밤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것이 주기적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거운 몸과 마음을 한탄하며 잠들었다 깨어난 어느 아침에 나는 드디어 범인을 잡았다. 잠을 잔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는데 기분이 저절로 가벼워져 있었다. 머릿속을 휙 지나는 게 있어 달력을 보며 찬찬히 헤아려 보았다. 월경 전 증후군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호르몬, 이것이 범인이었다. 


5년 동안 먹어왔던 약 복용을 갑자기 중단한 것 때문에 더 심한 증상을 겪은 것 같았다. 내 낙심과 우울에는 확고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달라진 호르몬 분비량 때문이라는 게 어이없었다. 도대체 호르몬은 무엇이고 얼마나 내 몸에 흐르는지 알아보았다. 호르몬은 우리 몸의 특정한 기관에서 분비되어 다른 세포에 신호를 전달하는 화학물질이다. 보통 혈액이나 조직에 극미량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극미량이라니 그게 얼마큼인가. 여성의 에스트로겐은 배란 주기에 따라 변동이 있지만 혈액 내 농도로 대략 40~400pg/mL이고 남성의 테스토스테론은 3~10ng/mL이다. 1나노그램 (ng)은 1그램의 10억 분의 1이고, 1피코그램은 (pg)은 1그램의 1조 분의 1이다. 한 줌의 솔솔바람이 마음에 태풍을 일으킨 것이다.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 극미량에 감정이 요동친 게 허무해서 내 무력함을 한탄했다. 그것이 기도 제목이었던 적도 있었다. 인생을 더 극적으로 몰고 가는 범인의 정체를 알았다고 해도 그 가진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치 선박의 작은 방향키가 목적지를 바꿔버리는 것처럼 호르몬은 적은 양이라도 엄청난 위력을 가질 수 있었다. 성호르몬에 이끌린 사람들이 무모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고, 세로토닌과 도파민 등의 부족으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종종 중대한 위기에 처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불행의 원인으로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만 탓할 수는 없겠지만, 원인 중 하나를 알았으니 이겨낼 방법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얼마 전 달라스한인문학회 모임에서 책 한 권을 얻었다. 『뇌 신경과학으로 본 마음과 문학의 세계』로 내과 전문의이자 소설가인 연규호 선생님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제럴드 에델만(Gerald M. Edelman) 교수의 저서를 기반으로 펴낸 책이었다. 호르몬을 이길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생명 뇌’인 대뇌하부의 뇌는 태아 생명 유지를 위해 임신 초기부터 발달한다. 그 위층으로 감정과 기억 처리에 관여하는 ‘감정 뇌’ 변연계가 자리 잡고 임신 중기부터 활발히 발달한다. 변연계의 시상하부는 다양한 호르몬 분비를 조절한다. 마지막으로 이성을 담당하는 ‘이성 뇌’ 대뇌피질이 형성되는데, 전두엽의 앞부분인 전전두엽은 출산 후 3세까지 성장한다. 이성의 뇌가 천천히 발달하는 점을 생각하면 왜 아기들이 본능에 더 충실한지 알 수 있다. 이성의 뇌는 25세 무렵에 완성되며 감정의 뇌와 평생 시소 싸움을 벌인다.


종일 보드라운 초콜릿 크림에 싸인 폭신한 케이크를 갈망하는 변연계의 욕구를 “그게 혈당 스파이크를 일으키면 네 혈관이 병들 거야.”라며 전두엽이 말린다. 옳은 판단이지만, 늘 이성이 이기는 것은 아니라서 기어이 케이크를 사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올 때도 있다. 감정에 호르몬까지 가세하면 연막을 피운 것처럼 이성이 길을 잃기도 한다. 때로는 감정이 쓰나미처럼 이성을 쓸고 지나가 그 대가를 치를 때도 있다. 


감정과 이성이 갈등하며 학습한 결과물은 기억으로 저장되고 그 기억이 정서를 이룬다고 한다. 분노가 걸러져 한으로 남고 기쁨이 다듬어져 명랑함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처절한 전투의 결과로 남아있는 정서에 주목했다. 내 머릿속 정서, 평화의 집에는 지혜로운 여인이 하나 앉아 있으면 좋겠다. 그는 감정이 원하는 걸 적당히 눈 감아 주기도 하지만, 보통은 이성이 감정을 조금 더 이기도록 조절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이 들수록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점점 더 힘겨워서다. 


이제는 갱년기로 접어들어, 또 한 번 호르몬이 요동친다. 이번엔 쉽게 속지 않고 내 몸에 먼저 주의를 기울인다. 잘 자고 잘 먹고 멋진 곳을 찾아 하이킹하러 다닌다. 두뇌가 일을 잘하도록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배운다. 


푸른 하늘이 더 높아진 이번 가을엔 어쩌면 호르몬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버클리 아카데미 에밀리 홍 원장내신 성적 관리 비법 Top 3 공개! 전교 1등부터 전교 바닥까지 다양한 학생들의 대학 입시 카운슬링을 15년 넘게 해오면서 깨우치게 된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학생의 내신 성적은 학생의 IQ에 비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머리 좋고 S…
    교육상담 2024-11-08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swoonpak@yahoo.com2625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초박빙의 이곳 미국 대통령선거가 본 컬럼이 지면으로…
    세무회계 2024-11-08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미국의 국립공원 중에 가장 많이 사람이 찾는 곳은 어디일까?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최고의 국립공원이라 하면 그랜드 캐년, 요세미티, 옐로스톤 등을 생각하게 되는데 미국의 방송사인 PBS에서 선정한 결과 다른 모든 국립공원을 제치고 1…
    문화 2024-11-08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세상에 없던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 창의성, 인생의 역경 중에서도 가능성을 발견하는 긍정성은 모두 생각에서 비롯된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극명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누구나 아는 사…
    부동산 2024-11-08 
    칼럼니스트 고대진◈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순…
    문화 2024-11-08 
    Hmart 이주용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오늘은 아침식사 대용이나 어린이들의 간식으로 안성 맞춤인 두유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두유는 ‘물에 불린 콩을 갈아, 물을 붓고 끓인 뒤 걸러서 만든 우유와 같은 액체’를 의미합니다. 두유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안/후…
    문화 2024-11-01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지난 달에 있었던 해외 풀꽃 시인상 시상식엘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시 보다는 소설과 수필을 주로 써왔는데 틈틈히 쓴 시로 수상을 하게 되어 더욱 기뻤는데, 어쨌든 난 시를 무척 좋아하고 시를 계속  써왔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
    문화 2024-11-01 
    공인 회계사 서윤교세금과 관련해서 상상외로 많은 분들이 여러 가지 잘못된 상식을 갖고 있는데 오늘은 그중 대표적인 5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1. 학생과 군인은 세금을 내지 않고 보고하지도 않아도 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학생이나 군인은 할인 …
    세무회계 2024-11-01 
    상업용 투자 전문가 에드워드 최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세상에 없던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 창의성, 인생의 역경 중에서도 가능성을 발견하는 긍정성은 모두 생각에서 비롯된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극명하게 달…
    부동산 2024-11-01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계절에 따라 변신하는 스모키 마운틴의 모습은 아침 새벽 길에 자욱하게 내린 운무의 화려한 자태에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테네시 주의 케틀린버그(Gatlinburg)를 출발하여 스모키 마운틴 자락을 관통하는 …
    문화 2024-11-01 
    유익한 비지니스 신용보험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한인 사업가들에게 비지니스 신용보험(Business Credit Insurance)을 알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10명에 9명은 잘 모른다고 대답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지니스 신용보험은 현재 신용사회가 정착된 미국, 유럽, …
    보험 2024-11-01 
    재정보험 전문 에이전트 주보윤"서부의 아이비"라고도 불리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초기 설립 자금이 한 사람의 사망 보험금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레이몬드 스탠포드와 그의 아내 제인은 아들 레일랜드 스탠포드 주니어가 1884년에 사망한 후, …
    보험 2024-11-01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확률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도박에서 돈을 따는 보장된 방법은 없다. 오히려 돈…
    문화 2024-10-25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swoonpak@yahoo.com2625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한낮은 아직 덥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가을의 정…
    세무회계 2024-10-25 
    백경혜 수필가이상하게 한 달에 사나흘은 더 고달프고 우울했다. 돈을 버는 것도, 마트에서 무얼 살까 결정하는 것도, 그 재료들을 다듬어 요리하고, 하루에 세 번 먹는 것을 반복하는 것도 권태로운 노동으로 여겨졌다. 가족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혼자서 많은 일을 감당…
    문화 2024-10-25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