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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휴가, 그 전대미문 前代未聞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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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문화 댓글 0건 조회 3,325회 작성일 20-04-1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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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에세이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전대미문의 괴질은 온 인류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마치 전대미문의 휴가라도 주는 듯 시간의 노예들을 풀어주는 듯 사람들의 동선을 집으로 돌려놓았다.
빛도 얼려버릴 냉정함으로 가차 없이 밖에서 안으로 가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듯 시간의 일력에 사로잡힌 노예들을 주저앉혔다. 그렇게 20여 일이 지나고 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라는 말이 실감 난다. 할 줄 아는 건 일 밖에 없었으니 널널한 시간에 얹히는 것은 당연지사다.
휴가, 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시간을 보내느라 매일 용을 쓰고 있다. 오전은 뚝 잘라내고 오후부터 시작되는 하루인데도 왜 이리 긴지 모르겠다.
너무나 기다렸던 시간이었다. 24시간 내내 네 식구가 함께 지지고 볶고 살았던 적이 며칠이나 될까. 험하고 고달픈 길을 마다치 않고 걸어오면서 난데없이 밀려오는 설움에 울부짖던 날을 생각하면 미래에도 없을 것 같은 소중한 시간임에 틀림없다.
살아도 살아내도 익숙해지지 않는 날들, 일만 하다가 그대로 죽을 것 같은 날도 많았다. 차라리 책이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앓아눕고 싶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알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처음 하루 이틀은 암울한 현실과는 상관없이 설레기까지 했다. 단 100여 일 만에 185개국에서 200만 명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이미 그로 인해 죽은 자가 12만 명을 넘은 이 무시무시한 현실 속에서 밀린 책을 원 없이 읽을거라는 생각에 기뻤다.
하루 24시간이 다 내 것이라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공지영의 소설 ‘해리’ 상 하 두 권을 이틀에 걸쳐 읽고 난 후 시린 눈과 녹록지 않은 몸 상태로 자괴감에 빠지고 나서 깨달았다.
하고 싶었던 것들은 시간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감고 또 감아올려도 길게만 늘어지는 시간. 그 시간에 지쳐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벌써 나는 시간의 노예로 살던 일상을 그리워하고 있다.





엊그제는 밀린 집 안 청소를 하느라 하루를 다 썼다. 화장실과 욕실 청소부터 창틀과 블라인드까지 쌓인 먼지를 닦아 내었다. 시작하면 무엇이든 끝을 보는 성격이라 식식거린 덕에 그날 밤은 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죽은 듯 자고 눈을 뜨니 신기하게도 아침 7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아침을 보는 게.
일찍 눈 뜬 김에 생산적인 일을 하려고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한인회에서 코로나 19로 최전선에서 싸우는 의료계 종사자들을 위해 마스크를 모으고 있다는데 수제 마스크도 가능하다니 동참하기로 했다.
물론 그게 뭐 그리 도움이 되겠냐마는 이렇게라도 마음을 보태고 싶었다. 천이라도 미리 끊어 놓았다면 좋았으련만 적당한 천이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찾아보니 얼마 전에 듀베이 커버를 만들고 남은 천이 있어 다행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천이 맘에 들어 마음이 놓였다.
한 개라도 더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꼼꼼하게 재단한 덕분에 자투리 천에서 두 겹짜리 마스크가 60장이 나왔다.
며칠 놀았다고 그새 몸이 굳었는지 속도가 붙지 않았다. 삼십 년 일상이 그 며칠로 무너지다니. 그래도 3시까지 가겠다는 약속은 지킬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식구들을 위해 주문했던 마스크도 40여 장 챙겼다. 세수도 못 한 얼굴에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를 쓰고 무장한 모습은 가십거리가 되던 연예인, 딱 그 꼴이었다.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가 한인회 사무실 문 앞에 놓고 인사는 커녕 도망치듯 돌아섰다. 이젠 KN95 마스크가 집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되었으니 세상이 뒤집히고 있는 게 분명하다.
씻고 나니 3시 30분. 그제야 첫 술을 뜨고 그 길로 쓰러져 꼬박 이틀을 앓아눕고 말았다. 아침 내내 뒤란을 들락거리던 남편이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나를 끌고 나간다. 뒤란은 눈부신 봄이다. 조금은 쌀쌀하지만, 볕이 맑아 축 늘어진 기분을 팽팽하게 당겨준다.
밤을 휩쓸고 간 회오리 바람에 더욱더 짱짱해진 상추는 햇볕을 받아 초롱초롱하다. 작년에 아이들이 심어놓은 파랭이 꽃도 뒤질세라 작은 얼굴로 팔랑팔랑 호들갑을 떨고 있다.
한 이틀 엄살을 떨었더니 안쓰러운 모양이다. 남편은 볕이 잘 드는 곳으로 테이블을 옮겨놓고 방석까지 깔아주며 끌어다 앉힌다. 랩탑에 커피까지 대령한다.
꼭 집을 떠나 근사한 곳으로 가야 휴가인가. 웅덩이에 갇혔던 시간을 꺼내 새끼줄 매고 탁탁 털어 말릴 수 있는 맑은 날이면 되는 것이지.
걸어도 달려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그늘진 골목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그늘에 땀을 식히면 되는 거지. 드세고 가파른 말에 받쳐 한 움큼씩 뜯어냈던 기억을 꺼내 맞추며 멍든 마음도 온순해진 시간으로 다독이면 그게 휴가가 아닐까.
믿는다. 이 시간도 지나간다는 것을.





빛도 얼려버리는 냉혈은
가차 없이 사람의 동선을 안으로 돌려
밖과 안, 과거와 미래를 단절시키고
너 나 없이 우리는
오래 짓무른 눈빛을 찾아보는 혈안이 되지만
기억은 단 한 움큼밖에 남아있지 않아
깨달음은 역시 우리의 근성이 노예라는 것
그랬음에도 또한 노예로
시간 앞에 무릎을 꺾는다





걸어도 달려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테두리
그것은 과거의 PEST나 오늘의 COVID 19 같은
그 무엇을 위한 새로운 위협이 아닌
노예의 무덤을 팔 때가 되었다는
그늘진 골목길에 대한 인식일 뿐이다





속박되었던 자유는 차라리
새로움에 목을 매지만
문밖에 늘어선 장사진은 여전히
가파르지도 거칠지도 않은
완만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시간의 여유
목이 조인다





노예는 숨통이 죄일수록
시계의 태엽을 바짝 조이는 고통으로
소리를 낼 뿐이다





저마다의 언어로 화음을 맞추는
창밖의 나무들과 꽃들이 아름답다고
일상이 그러할
밖으로 대는 동선이 되기 위해
KN95 마스크를 써야 한다





해는 뜨고 날은 밝겠지만.
김미희, (휴가, 그 전대미문 前代未聞 의) 전문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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