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야생 보호구역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303회 작성일 24-02-02 14:44

본문

미국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시작할 때다. 모든 것이 잘 다듬어진 미국 도시의 깨끗함과 정리된 풍경은 나를 압도했다. 그러나 늘 엽서나 그림에 나오는 도시의 모습을 보며 지내다 보니 모든 풍경이 항상 정리된 그림 같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좀 여유 있게 풀도 있고 자연 그대로 내버려둔 내 고향의 곶자왈 같은 곳이 그리워졌다. 이럴 때 내가 발견한 곳이 학교 가장자리에 있는 워싱턴 호숫가의 야생 보호구역(wilderness area)이었다. 

워싱턴 대학 축구장 끝에 있는 조그만 나무 무지개 다리 건너에 위치한 곳인데 말 그대로 자연 그대로 개발하지 않고 야생을 그대로 둔 곳이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모든 모터가 있는 바퀴들은 출입을 금함. 주위 동물들이 놀라지 않게 소리를 내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다리 아래로 졸졸 흐르는 냇물에는 작은 송사리 때들이 수초 속을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고, 다리를 건너 내 키를 조금 넘은 덤불 사이로 난 흙 길을 따라 가면 이제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랜 어린 시절의 고향의 들판이며 포장하지 않은 오솔길이 보였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무릎 정도의 키가 낮은 야생 숲이 오솔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펼쳐 있고 조금 더 가면 큰 시골집 마당 만한 연못에 청둥오리 열 댓 마리가 한가롭게 떠 있었다. 

연못을 지나 갈대 숲 사이로 워싱턴 호수가 눈에 다가오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긴 부교가 멀리 뻗쳐 있는 것이 보였다. 갈대숲과 맞닿은 호숫가에 작은 파도가 철썩거리며 물살을 일으킬 때는 예이츠의 시에 나오는 이니스프리 섬이 이런 곳이 아닌가 생각했다. 봄이 오면 정말 예이츠의 시구처럼 벌들이 언덕에 있는 찔레꽃에 붙어 붕붕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공부로 복잡해진 머리를 표백하고 싶으면 그곳에 가서 발목이 시도록 포장 안된 땅을 밟거나 몇 시간이고 호숫가에 있는 바위에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그러면 헝클어진 생각이 저절로 풀리곤 했다. 

연구 논문을 쓸 때 꽉 막힌 머리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고 풀릴 듯 말 듯한 문제의 해법이 이곳에서 나왔다. 

가끔 큰 바위 옆에 화구를 풀고 두 손으로 구도를 만들어보면서 스케치북을 들고 막혔던 생각을 떨쳐버리고 연못, 바위, 요트, 구름, 청동오리 등을 스케치하기도 했다. 그러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면 바람의 방향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 수학적으로 어떤 모델을 만들지 생각했다. 

내 박사 논문으로 생각이 바뀐 것이다. 어쩌다 반짝하고 이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며 운이 좋으면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리기도 했다. 

당시 난 박사 논문과 다른 주제로 알래스카 정부에서 ‘고래 인구조사‘라는 용역을 맡아 고래 수의 변화와 그 편차를 계산하기 위한 통계학적 모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알래스카의 땅끝마을 노스슬롶 버로(North Slope Borough)에 있는 바로 곶(Point Barrow)을 지나 20마일을 얼은 바다 위로 가면 봄이 되어 녹기 시작하는 얼음 사이로 북극을 향해 강같이 뚫린 바닷길이 생긴다. 이 길을 통해 북극해에 있는 풍성한 먹이를 찾아서 고래들이 줄줄이 이민을 간다. 그 중에 북극고래(Bowhead Whale)라는 종류의 고래의 수를 추정하고 추정된 개수의 통계적 편차를 계산하는 일이 용역의 핵심이었다. 알래스카 원주민에게 허용된 고래 사냥 할당량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바닷길을 지나는 고래를 관측하는 장소는 얼음으로 변한 바닷가에 높이 솟은 얼음 바위를 깍아 그 위에 병풍 같은 바람막이를 설치한 곳이다. 

난 내가 앉은 바위를 관측소로 생각하고 멀리 지나가는 배들을 고래라고 가상하여 여러 가지 수학적 모델을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에 몰두하고 있으면 어둠이 어느새 옆에 와 앉아 있곤 하였다. 이 연구로 졸업전에 네 편의 논문을 완성할 수 있어서 이 야생 보호구역은 내 고래 연구의 고향이고 바람의 방향 연구의 뿌리인 셈이다. 

아마도 야생 공원이 주는 공간의 여유로움이 나의 머리에 긴장을 풀어 막혔던 문제의 해법을 발견하게 한 것 같다. 

생각이 많아지고 문제는 안 풀리면 긴장이 머리 끝까지 뻗친다. 머리에 쥐가 난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그런데 한적한 시골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그곳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마음대로 생각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기존 연구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아마도 모든 것이 꽉 짜인 다듬어지고 정리된 곳에서는 들 수 없는 생각이 아닐까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하나에서 열까지 꽉 짜인 스케줄로 생활하게 하면 뭔가 이룰 것 같아 세게 밀어붙이지만 결과가 생각처럼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야생 공원같이 조금 느슨하게 풀린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창조적인 생각을 할 여유를 찾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아직도 난 이런 야생 보호구역(wilderness area)을 자주 찾는다. 글을 쓰고 생각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진 작가

 

◈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Ryan Kim (텍사스 인저리)이번 칼럼에서는 변호사와 손님과의 소통과 협업의 중요성에 대하여 나누어 보려고 한다. 물론 변호사를 선임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개인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서 그리고 개인이 진행할 때 보다 더 나은 보상을 원하시기 위함을 익히 알고 있으나…
    법률 2024-12-20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답이 뻔한 질문을 칼럼 제목으로 적어놓았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전과 편리해진 일…
    문화 2024-12-20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swoonpak@yahoo.com2625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우리 모두 바쁘게 달려온 2024년이 이제 막바…
    세무회계 2024-12-20 
    박인애 (시인, 수필가) 모델들이 런웨이에서 워킹을 하다 구두가 벗겨지거나 굽이 부러져 넘어지는 사고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일반인이었다면 놀라서 주저앉겠지만, 프로는 대처법이 다르다. 평소 까치발을 들고 워킹 연습을 해 온 노하우 덕분일 수도 있겠으나, 언제 그런 …
    문화 2024-12-20 
    그린웨이 배준원2025년 새로운 컨포밍 융자한도(Conforming Loan Limit)가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현재의 $766,550에서 $806,500로 다시 상향 조정된 것이다. 팬데믹을 겪던 2021년 말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매년 컨포밍 융자한도는 상향조정되어왔…
    세무회계 2024-12-20 
    현 시대 가장 핫한 인물 1위는 누가 뭐래도 일론 머스크이지 않을까 싶다. 일론 머스크는 현대 기술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그의 독특한 사고방식은 단순한 기업가 정신을 넘어선다. 오늘은 일론 머스크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철학과 사고를 가졌으며, 그의 사고방식은 무…
    부동산 2024-12-20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하늘이 물에 내려오면서 끝없이 펼쳐진 호수와 바람, 그리고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요즘처럼 비가 내리면 하늘과 세상이 물에 잠길 것 같지만 여전히 그 속에 비쳐진 모습은 잔잔한 물결…
    문화 2024-12-20 
    엑셀  카이로프로틱 김창훈 원장 Dr. Chang H. KimChiropractor | Excel Chiropracticphone: 469-248-0012email: excelchirodallas@gmail.com2681 MacArthur Blvd suite 103, …
    건강의학 2024-12-20 
    칼럼니스트 고대진 ◈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
    문화 2024-12-13 
    공인 회계사 서윤교LLC 또는 Corporation 등 법인체로 회사운영을 하는 분들 중에 이미 많은 분들이 실질적 소유주 보고를 마쳤을 것이다.  보고기한이 2주도 채 남지 않은 12월 31일까지 이기 때문이다.  미연방의회는 2021년 ‘Corporate Trans…
    세무회계 2024-12-13 
    버클리 아카데미 에밀리 홍 원장먼저 성탄절을 맞아 2024 년 한해동안 제 칼럼을 사랑해 주신 모든 학부모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2025년 새해에도 각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 하시길 기도합니다. 미국 겨울 방학은 워낙 짧다보니 가족 여행, 연말모임, 각종 …
    교육상담 2024-12-13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미국에서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축복 가운데 하나는 광대한 대륙을 쉼 없이 운전하여 다닐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끝이 안 보이는 초원을 운전하다가 사막을 만나면 인생의 중간을 점검하게 되고 다시 핸들을 잡으면 흩어…
    문화 2024-12-13 
    여행자 보험 이광익 (Kevin Lee Company 보험사 대표)지난 3년여 펜데믹 사태로 인해서 국내외 여행이 극도로 자제되어 오다가 이제 점차 정상화되고 있어서 참 다행스럽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말하는 여행에는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소극적 의미로는…
    보험 2024-12-13 
    Hmart 이주용 차장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여러분은 혹시 케이준이라는 뜻을 알고 계신가요? 식당을 가면 종종 볼수 있지만 어렴풋이 느낌으로만 알고 있는 이 단어와 그와 관련된 음식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원래 케이준은 음식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루이지애나 근방…
    문화 2024-12-13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swoonpak@yahoo.com2625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바다건너 고국에서는 대통령이 종북세력을 척결하고 자…
    세무회계 2024-12-06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