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그리움을 삭이는 방식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222회 작성일 24-03-15 17:47

본문

Apple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파친코’ 시즌1에서 주인공 선자는 어머니와 함께 자기 하숙집에 손님으로 왔던 전도사 이삭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랑해서 한수의 아이를 임신해 미혼모가 될 처지에 놓인 선자의 사연을 우연히 듣게 된 이삭은 그녀에게 청혼하고, 목사님의 기도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선자는 이삭과 함께 어머니와 정든 고향을 떠나 일본 이쿠노쿠에 있는 형 요셉의 집에서 살게 된다. 

어느 날, 몸이 무거운 선자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형님이 선자의 빨래를 해 널고 있었다. 고향의 냄새가 담긴 옷으로 그리움을 달래던 선자는 옷을 빨아서 냄새가 다 없어졌다며 서럽게 운다.

선자가 형님에게 이렇게 아린 게 언제쯤 끝나게 되냐고 묻자, 참는 법을 배우게 될 거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움은 사라지거나 끝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꾹꾹 눌러 참는 법을 익혀가는 거였다. 노력해도 통제되지 않는 게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이국에서 그리움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두 여인의 삶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선자의 아림이 내 아픔으로 다가왔다. 

딸 친구 중에 고향이 인디아인 아이가 있다. 그 친구가 보낸 사진을 보고 뭉클했던 적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을 실제로 보아서인지 잊히지 않는다.

사진 속엔 자주색 블라우스가 벽에 걸려있었다. 옷에 초점이 맞춰진 사진이라 방안에 놓인 살림이 선명하게 부각되진 않았으나, 부유해 보이진 않았다. 그 친구의 엄마는 돌아가셨다. 아빠는 엄마가 즐겨 입던 블라우스를 일 년째 벽에 걸어 놓고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런데 홍수가 났다. 천장에서 비가 새는 바람에 옷이 젖어서 어쩔 수 없이 빨게 되었는데, 엄마 냄새가 사라져서 아빠가 슬퍼한다는 사연을 사진과 함께 전해왔던 것이다.

죽은 아내의 옷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살아있는 아내를 두고도 바람을 피우거나,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 남편이 있다는 혼탁한 세상에 살다 보니 아내 냄새가 사라진 옷을 끌어안고 우는 남편이 인간문화재처럼 느껴진 건 지도 모르겠다. 

친정어머니가 48살의 짧은 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라는 표현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체험했었다.

부지런했던 어머니는 빨랫줄에 널어 둔 빨래를 밤이슬이 내리도록 걷지 못했고, 늦둥이 아들이 걱정되어 눈을 뜬 채 숨을 거뒀다. 동네 어른들이 엄마가 쓰던 옷가지와 물건을 태우라고 하셨다. 그래야 훌훌 편히 갈 수 있다고.

장의사 소각장에서 태워 준다고 하여 챙겨다 주긴 했지만, 다 주진 못했다. 나 역시 엄마의 옷을 빨지 않은 채 오랫동안 끌어안고 살았다. 엄마 냄새는 그리움을 달래고 삭이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누구나 가슴 속에 그리움이란 우물을 묻고 산다. 때로는 퍼 담고, 때로는 퍼 올리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리움의 수위를 조절하며 사는 거다.

부재나 상실에서 오는 그리움은 인력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애써 누르고 또 누르며 삭여야 한다. 그래서 때론 망각이라는 기능이 감사하다. 상실의 아픔을 매순간 기억한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사진을 보고, 누군가는 추억하고, 누군가는 유품을 어루만지고, 누군가는 옷에 남은 체취를 맡으며 숨통을 연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지인은 마음이 힘들거나 그리울 때면 아침 일찍 남편 산소에 들러 푸념을 늘어놓곤 한다. 나 혼자 놔두고 거기 편히 누워 있으니 좋냐고 통박을 주고, 속풀이도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와 하루를 시작한다. 

 

심성보 시인은 그의 시 「그리움이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리움이란

누군가에겐 행복의 사랑으로 다가오는 기쁨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떠난 사람 뒤에 오는

슬픔의 얼굴을 가진

차가운 비수 같은 것일 테지”라고. 

 

내 그리움은 어느 쪽일까? 이 세상 어딘 가에 내가 그리워서 그리움을 삭이는 이가 있을까? 근간 여러 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마다 삶과 죽음, 인연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눈을 뜨면 떠오르는 그리운 사람들, 차마 떼어내지 못해 끌어안고 산다.

그리움이란, 고통이기도 하지만, 산 자가 누리는 축복이기도 하다. 어쩌면 삭이지 않아도 좋을 그리움이 나를 살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리움이라면 끌어안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워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크리스마스 연휴부터 새해까지 작은아들이 있는 오스틴에 머물렀다. 가까운 거리이긴 하지만 자주가지는 못했는데, 아이가 일년 여에 걸쳐 지은 새집이 완성되었다 하여 겸사겸사 가게 되었다. 이제 서른 중반에 든 아이는 아직 결혼할 마음이 없어서 …
    문화 2025-01-10 
    공인 회계사 서윤교2025년 새해가 시작됐다. 대한민국은 비상계엄, 대통령 탄핵, 여객기 사고 등 다른 나라에서는 30년 동안에 일어날법한 일들이 불과 1달 안에 발생하는 초유의 사태로 우울하게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특히 달러 대비 원화의 약세가 두드러지는데 지난 주말…
    세무회계 2025-01-10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미국의 곳곳을 여행할 때에 계절마다 이어지는 예술인의 축제가 있는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평소 여행을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 가운데 특별한 자신의 자화상을 투영하는 것에 많은 희열을 안겨다 줍니다. 산타페, 세도나 등, …
    문화 2025-01-10 
    집에서 고용한 사람의 부상과 보상이광익 (Kevin Lee Company 보험사 대표)신문을 읽다보면 가정집의 관리 유지를 위하여 고용한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 제공자들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집 주인이 법적 보상책임을 떠 맡아야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
    보험 2025-01-10 
    Hmart 이주용 차장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갈비는 고기 부위 중 하나로, 갈비뼈와 그 주변의 고기 부분을 의미합니다. 주로 바비큐나 구이 요리에 사용되며, 부드럽고 육즙이 많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고기입니다. 육질이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특징이며, 보통 양념…
    문화 2025-01-10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swoonpak@yahoo.com2625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지난 한해 특별히 바다건너 고국은 그야말로 더 이상…
    부동산 2025-01-03 
     백경혜 수필가친정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선물로 들고 간 간식들을 좋아하셨다. 그중 몇 가지는 방으로 가져가 숨겨두셨다. 치매 증세 중 하나인 줄 알았지만, 아버지 방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간식 봉지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언니가 먼저 사다 놓은 간식 옆에 내 선물이…
    문화 2025-01-03 
     상업용 투자 전문가 에드워드 최2025년 미국 상업용 부동산 시장은 경제 및 기술 변화, 근무 형태의 전환,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 증가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투자자들은 시장의 변화를 면밀히 분석하고, 구체적인 전략…
    부동산 2025-01-03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음악과 책과 여행이 어울리는 계절, 이 계절에 지나간 많은 시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살며시 나의 눈에 눈물을 고이게 하지만 점점 깊어가는 계절의 속내음이 내 가슴속을 품게 하고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이…
    문화 2025-01-03 
    김미희 시인 / 수필가 “세월이 유수와 같다.”라는 말이 정말 실감 나게 한 해였다. 2024년도 일주일 정도 남았으니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된 것 같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에 발을 맞추다 보니 정신없이 살았다. 얼떨결에 맡아버린 민주평통 간사와 한인회 부회장 직함을…
    문화 2024-12-27 
    공인 회계사 서윤교2024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이맘때쯤이면 다가오는 새해의 계획보다도 앞으로 남은 며칠 동안 2024년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 2024년도 세금보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특히 올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4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비트…
    세무회계 2024-12-27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세상의 조명이 모두 꺼지는 날 차가워진 몸과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빛이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조그만 빛 하나가 세상을 비출 때 우리는 서로의 미소를 창가에 살며시 걸어놓고 내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이웃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점점…
    문화 2024-12-27 
    이광익 (Kevin Lee Company 보험사 대표)사고 자동차와  폐차대부분의 충돌사고는 자동차를 수리해서 다시 쓸 수 있는 만큼 경미하지만 전체 사고의 일정한 비율은 자동차가 폐차되는 대형사고에 해당된다.  고객의 사고처리를 돕다보면 사고로 차를 폐차 처분해야 한…
    보험 2024-12-27 
    Hmart 이주용 차장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크리스마스에 가족들과 즐길 수 있는 디저트 2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번째로는 파네토네(PANETTONE)라는 빵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조금 생소할 수 있지만 서양인들에게는 연말에 빠트릴 수 없는 디저트입니다. 서양마…
    문화 2024-12-27 
    조나단 김(Johnathan Kim)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졸업- 現 핀테크 기업 실리콘밸리   전략운영 이사실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부모의 역할대학 합격 대기자 명단(college waitlist)에 오르게 된 소식을 부모와 자녀가 접하는 순간은 매우 실…
    교육상담 2024-12-27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