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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한여름밤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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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292회 작성일 25-08-30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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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 / 수필가

 축구장을 찾은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박찬호와 추신수 덕분에 야구장은 여러 차례 가보았지만, 축구장은 쉽사리 인연이 닿지 않았다. 더구나 한여름의 땡볕 아래 달라스의 경기장을 찾은 것은 내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경기는 저녁 7시 30분에 시작이었지만, 해가 아직 머리 위에 뜨거울 때 이미 관중들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전날부터 몸살 기운이 있어 약을 먹고도 찾아온 경기였기에 혹시나 중간에 지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입장 순간 모든 불안은 사라졌다.


  이날은 손흥민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오랜 시간 기다려온 날이었다. 십오만을 넘는 달라스 한인 사회가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를 보여주듯, 관중석 절반은 한인으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등판에 ‘SON 7’이 새겨진 유니폼이었다.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같은 번호와 같은 이름을 등에 달고 하나의 군중으로 모여 있었다. 태극기를 흔드는 손길, 얼굴에 새긴 붉은 물감, 직접 만든 배너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축제였다.


  드디어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들어섰다. 우레 같은 함성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이는 손흥민 선수였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환한 얼굴, 세계 무대에서 빛나는 자부심. 그는 단순히 한국인의 스타가 아니라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간판선수였고, 아시아 전체의 우상이었으며, 나아가 축구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의 영웅이 분명했다.


  그리고 시작 6분, 상대편 진영에서 얻은 프리킥 기회가 찾아왔다. 순간 경기장은 숨을 죽였다. 모든 이의 시선이 오직 하나의 지점을 향해 쏠렸고, 그 한가운데 손흥민이 서 있었다. 그는 공 앞에서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짧게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그의 심장 박동만이 들려오는 듯했다.


  차분히 내딛은 발걸음, 그리고 날카롭게 내지른 발끝. 공은 곧장 날아오르지 않았다. 미세한 떨림을 드러내며 부드럽게 떠올라 포물선을 그리며 골문으로 향했다. 우리의 시선은 하나의 궤도로 묶이듯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그 곡선을 따라갔다. 골키퍼가 몸을 날렸으나 공은 손끝을 외면하듯 비껴가며 더 높고 깊은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골대 상단 모서리, 해설자들이 ‘죽음의 구석’이라 부르는 자리. 오직 가장 정확한 슈팅만이 닿을 수 있는 좁고 날카로운 공간에 내리 꽂히는 순간, 경기장은 폭발했다. 기다림과 갈증이 한꺼번에 풀려나듯 함성이 터져나왔고,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울부짖었다.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그는 이미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간판스타였고, 아시아의 우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보다 더 큰 존재였다. 뙤약볕 같은 이민의 삶에 지쳐 있던 우리의 가슴에 시원한 바람을 불어넣는 사람, 우리 아이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그것은 단순한 한 골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전 세계 축구 팬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낸 인류의 순간이었다.


경기가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새벽의 어둠 속으로 일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누군가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날 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함성과 태극기의 물결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일상의 무게는 다시 찾아오겠지만, 그 무게를 견디게 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이미 우리 안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민자의 삶은 고되고 외롭다. 부모 세대는 언어와 노동의 벽을 넘어야 했고, 자녀 세대는 정체성과 미래를 두고 갈등한다. 그러나 손흥민이라는 한 젊은이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 아이들은 그를 보며 더 큰 꿈을 꾸고, 어른들은 그의 땀방울 속에서 외로움을 위로받았다. 그라운드 위에서 힘차게 달리는 그의 모습은 곧, 이민자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우리는 이미 다른 이름들을 기억한 적이 있다. 박찬호가 마운드에 서던 날, 추신수가 타석에서 방망이를 휘두르던 순간들. 그들의 이름은 낯선 땅에서 버티는 우리의 어깨를 곧게 펴게 했고, 이민자의 고단한 하루를 견디게 하는 작은 등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축구는 멀리 있었다. 텔레비전 속 경기로만 접하던 스포츠, 직접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부를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달라스의 여름밤에 모습을 드러낸 손흥민은 이미 결과와 상관없이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날 밤, 텍사스의 더위는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손흥민은 단지 공을 찬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향수와 고단한 마음을 차올려 하늘로 흩어지게 했다. 그리고 남긴 것은 다시 시작할 용기, 더 큰 꿈을 꿀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한여름밤의 축제는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민자의 삶에 스며든 새로운 희망의 노래였고, 우리 아이들의 가슴 속에 별빛 같은 꿈을 심어준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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