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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진] 폭싹 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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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857회 작성일 25-03-28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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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고대진

◈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다. 주인공 애순이와 관식이가 필자와 비슷한 나이로 설정되어 가난하고 배고팠던 아련한 시절의 추억과 함께 아름다운 내 고향 제주의 풍광을 볼 수 있어서 열심히 감상하고 있다. 이 극이 내 관심을 끈 것은 드라마의 제목이었다.  '폭싹 속았수다'는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라는 뜻의 제주 사투리인데 바로 제주도 이야기라고 알고 보기 시작했다. 


많은 육지 사람들은 ‘속았다 ‘라는 말이 ‘사기당했다’라는 말로 생각한다. 내 절친의 부인도 그런 사람이었다. 제삿날 시집에서 제사 준비하느라 많은 음식을 장만하고 나니 시어머니가 “모큰 속았져”라고 말했다. ‘모큰’은 ‘많이’라는 말이고 ‘속았져’는 수고했다는 말이니 ‘폭싹 속았수다’ 와 같은 말이었다. 친구 부인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내 친구에게 가서 “어머님이 내가 속았다고 하는데 뭘 속았어?”라며 속상해하기에 사투리라고 설명해도 믿지 않았었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 전 안도현 시인이 엘에이 근처 ‘오렌지 글사랑’ 모임에서 강연했는데 그분의 시 가운데 ‘무말랭이’라는 시가 나왔다. “외할머니가 살점을 납작납작하게 썰어 말리고 있다/ 내 입에 넣어 씹어 먹기 좋을 만큼 가지런해서 슬프다/ 가을볕이 살점 위에 감미료를 편편 뿌리고 있다// 몸에 남은 물기를 꼭 짜버리고/ 이레 만에 외할머니는 꼬들꼬들해졌다// 그해 가을 나는 외갓집 고방에서 귀뚜라미가 되어 글썽글썽 울었다”라는 시인데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라고 했다. 그리고 경북에서는 ‘곤짠지’ 혹은 ‘오그락지’라고 부른다면서 다른 지방의 사투리가 있는지 물었다. 무시 빼깽이, 무수 써래기 (전남), 무수 가시래기, 무수 고재기(충남), 무수 말린갱이(충북), 무고자리(경기) … 등등이 나왔는데 내가 ‘생기리’ 라고 하자 생기리? 어디 말입니까? 라고 물어왔다. 제주도라고 하니 어원이 무엇이냐는 묻는데 답할 수 없었다. 


‘생기리’같이 육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 가운데 ‘놈삐’가 있다. 제주에선 무를 ‘놈삐’라고 하는데, 잘 아는 고향 후배 부인에게서 들은 ‘놈삐’에 관한 일화다. 서울 처자인 후배 부인이 우리 마을에 시집왔다. 당시 수도와 전기가 안 들어왔을 정도의 시골이었는데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첫날 아침을 차리려고 신부가 정지(부엌의 제주말)로 나갔는데 시어머니가 벌써 나와 있었다. 어머님 제가 뭘 할까요? 라고 공손히 묻는 며느리에게 “놈삐 썰라!”라고 하시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뭘 썰라는 말인데 뭔지는 모르겠고 잠자는 신랑을 깨워 “여보 놈삐가 뭐야?” 하고 물었다. “응? 놈삐 그건 무야.” 그럼 무를 썰라는 말인데 어떻게 썰어? 깍두기 식으로 썰어야 하나 아니면 넢적 넢적? 아니면 어떻게? 뭘 할 건데… 하면서 부엌에서 고민했던 일을 말해주어서 웃었다. 아마도 아침 무국을 끓이기 위해 무를 썰라 하셨는데 제주도 무국은 체를 썰어 끓이니까 그렇게 놈삐를 썰라는 말이었다. 시어머니도 어려운 육지 며느리가 왔는데 육짓말은 알아듣지 못하겠고 답답해서 ‘놈삐 썰라’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제가 책을 하나 쓸려고 하는데요, 책 제목이 ‘놈삐 썰라’ 입니다. 제주어 때문에 일어난 일들을 얘기하고 싶어서요”라던 그 서울 처자는 그 책을 썼을까 모르겠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서 여자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얼마나 고생하고 살았고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제주에서는 외지인들이 들어와 수탈을 많이 해 가곤 해서 외지인을 배척했다. 몽고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심한 욕은 “몽곤놈, 몽곤년”이다. 그보다 조금 덜하지만 “육짓놈, 육짓년”도 욕에 해당한다. 그러니 일본에서 들어와 한국말이나 제주도 말이 서투른 우리 어머니의 시집 생활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해본다. 할머니와 고모들은 해녀였다. 할머니는 상군 해녀였다는데 물질도 잘하고 밭일도 하고 집안일도 잘하는 억척스러운 제주 여자 대신 일본에서 교육받은 책만 보는 ‘육짓년’이 며느리로 들어왔으니 참으로 못마땅하셨을 거다.  <폭싹 속았수다>의 ‘관식’이 나이의 아버지가 ‘관식’이 처럼 마음을 써 주어 마을의 유일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직장생활을 하게 하셨기에 가능한 시집살이였을 것이다. 물질을 못 하고 밭일도 못하더라도 ‘선생님’은 선생님이니까. 


선생님으로 일하시던 어머니는 우리에게 교과서에서 나오는 표준말을 하도록 했다. 당시 시골에서 쓰던 사투리는 어머니는 어멍, 아버지는 아방, 할머니는 할망, 할아버지는 하루방이다. 아주머니는 아주망, 아저씨는 아주방, 나머지는 다 ‘삼춘’이다. 동내 아이들이 모두 ‘어멍 아방’ 하고 부르는데 우리는 꼭 ‘어머니 아버지’ 라고 해야 했고 꼭 “할아버지 할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혹은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라고 인사하게 시켰다. ‘너는 여기서 해녀로 살지 말고 넓은 데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살라’는 극 중의 애순이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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