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데스크칼럼
[기자의 눈] 그래도 새해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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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한인 사회가 다시 묻는 질문
해가 바뀐다고 삶이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는다. 어제의 걱정은 오늘도 그대로이고, 어카운트 잔고와 건강, 자녀 문제는 달력 한 장 넘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새해가 밝았다고 해서 현실이 갑자기 관대해지는 일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년 새해를 기다린다.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오늘을 버틸 수 있고, 내일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주 한인 사회가 마주한 현실도 녹록지 않다. 물가는 여전히 높고, 경기 회복은 체감되지 않는다. 정치와 사회는 갈수록 양극화되고, 국제 정세는 불안정하다. 미국 사회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다시 거친 언어와 대립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그 여파 속에서 이민자 사회는 늘 그렇듯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영향을 받는다.
자영업자들은 손님이 줄어드는 현실 앞에서 하루하루를 계산하며 버티고 있고, 직장인들은 구조조정이라는 단어를 마음 한편에 올려둔 채 출근한다. 은퇴를 앞둔 세대는 노후 자산과 의료비를 걱정하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이 아이들이 살아갈 미국 사회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불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깔린 공기처럼 퍼져 있다.
이런 불안은 미국 국경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최근 미군이 베네수엘라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해 축출한 사건은 미국 사회 안에서도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국제사회에는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다.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한 군사 개입이 정당한가, 정권 교체를 무력으로 실행하는 선례가 앞으로 어떤 국제질서를 낳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동시에 제기됐다.
미국 내 여론조사에서도 찬반은 팽팽하게 갈렸다.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과정이 남긴 메시지다. 세계 최강국의 군사력이 다시 한 번 ‘정치적 선택지’로 등장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정이 의회와 시민사회의 충분한 합의 없이 추진됐다는 점은 미국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 자체를 되묻게 만든다. 이는 중남미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맹국과 이민자 사회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구조적 변화다.
미주 한인 사회 역시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 변화는 곧바로 이민 정책, 경제 정책, 국제 긴장으로 이어지고, 그 파장은 결국 우리의 일상으로 스며든다. 국제 질서가 불안정해질수록 이민자 사회는 늘 먼저 긴장하고, 나중에 보호받는다. 그래서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했던 외교 뉴스가 사실은 우리 삶의 안전망과 직결된 사안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기까지 잘 버텨왔다. 언어도 문화도 낯선 땅에서 가정을 일구고, 자녀를 키우며, 묵묵히 일해왔다. 화려한 성공담은 아닐지라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낸 시간 자체가 이미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이야기다. 미주 한인 사회는 소비자이자 노동자였고, 동시에 지역사회를 지탱해온 시민이었다.
새해를 맞아 우리는 스스로에게 조금 더 솔직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문제들에 충분히 참여하고 있는가. 이민 정책, 의료 제도, 교육 환경, 치안과 세금 문제는 모두 정치와 직결돼 있다. 워싱턴에서 내려지는 결정은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매달 날아오는 의료비 고지서와 학군 선택, 자녀의 장래,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얼마나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지를 좌우한다.
그럼에도 한인 사회는 여전히 정치 이야기에 조심스럽다. 괜히 말했다가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관계가 틀어질까, 혹은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는 말을 듣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소수자로 살아온 경험은 조용히 지내는 것이 안전하다는 학습을 남겼고, 그 관성은 지금도 우리를 붙잡고 있다.
하지만 침묵이 언제나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목소리를 내지 않을수록 우리의 존재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점점 희미해진다. 정치적 계산은 냉정하다. 표가 되지 않는 집단, 조직되지 않은 집단의 요구는 언제든 뒤로 밀려난다. 베네수엘라 사태를 둘러싼 미국 내 논쟁 역시, 시민의 감시와 참여가 약해질 때 권력의 선택지가 얼마나 빠르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치가 싫어서 등을 돌린 사이, 정치는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예산과 교육 과정, 병원비와 보험 적용 범위, 이민 신분의 안정성, 노후 복지와 세금 부담까지 모두 정치의 결과다. 선택하지 않아도 선택의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의 삶으로 돌아온다.
이제는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이 분열이나 소란이 아니라,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동의하지 않아도 질문할 수 있고, 싸우지 않아도 참여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합의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견제로 유지된다.
그렇다고 분노와 피로감 속에서 새해를 시작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뤄낸 삶은 결코 작지 않다. 성실하게 일하고 세금을 내며 공동체를 유지해온 것 자체가 이미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온 증거다. 이제 여기에 아주 작은 참여를 더할 차례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뉴스를 외면하지 않고, 한 번 더 묻고, 한 번 더 대화하고, 투표장에 가는 것. 변화는 언제나 그런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된다. 성공보다 생존이,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한 시대다.
혹시 지금 지쳐 있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다. “그래도 여기까지 잘 왔다”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조용히 걸어가면 된다. 새해는 늘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우리 곁에 와서 다시 시작할 기회를 준다.
그래도 새해는 왔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해를 살아낼 것이다. 두려움보다 책임을, 체념보다 희망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미주 한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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