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소담 한꼬집’ ] 그리고 맑음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1,813회 작성일 22-05-27 10:27

본문

밖이 조용해진 걸 보니 비가 멎은 모양이다. 

모처럼 시원하게 비가 왔다. 종일 뼈마디가 쑤시고 다리가 저렸지만,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가 좋았다. 빗줄기는 굵기와 세기 그리고 어디로 떨어지는가에 따라 소리가 다르고 누구와 듣느냐에 따라 느낌도 다르다. 나는 양철로 된 빗물받이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좋다. 경쾌한 그 소릴 듣고 있으면 김연수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요즘 같으면 어디 파타고니아나 마케도니아 같은 곳으로 도망쳤을 텐데, 그때는 외국으로 나갈 수가 없었던 시절이니까 나름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까지 간 셈이지. 그렇게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에서 바다 보면서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 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한 시 정도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 석 달 동안 밤이면 감독님 품 안에서 빗소리 들으면서 누워 있었지.”

 

함석지붕 위로 떨어지던 빗소리를 기억한다. 얼마나 요란한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몸이 고달파지면 비가 오거나 말거나 어느 순간 그 소리를 베고 잠이 들기도 했지만, 엄청난 소음이었다. 그런데 소설 속 이모는 그 빗소리에서 음악 소릴 듣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두려울 것도 없고, 열악한 환경이어도 행복했던 모양이다.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고 귀가 닫히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 사랑은 현실에 부딪혀 오래가지 못했다. 

수없이 많은 빗소리 중에 기억 속을 떠나지 않는 내 유년의 빗소리는 낮고 슬프다. 징글맞을 만도 한데 여전히 그 궁상맞은 빗소리가 좋다. 사연은 다르지만, 누구나 인력으로 떼지 못할 기억 하나씩은 품고 사는 것 같다. 그게 행복이든 불행이든 말이다. 

 

블라인드를 열고 흐린 하늘과 젖은 거리, 창문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책상에 진득하게 앉아 있질 못하고 자꾸 창밖을 기웃거렸다. 결국, 밖으로 나갔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내 안에 덜 자란 계집애가 하늘 향해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맨발로 비를 밟았다. 감각 없는 오른쪽 발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냉장고 티셔츠는 이름값을 하느라 물에 닿으니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했다. 

 

소나기가 와도 학교에 우산을 들고 와 줄 엄마가 없어 온몸으로 비를 맞아야 했던 계집애는 그 비가 시원했다. 눈물을 들키지 않아 좋았고 속상한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아 좋았다. 모든 게 편해진 지금도 여전히 비를 기다리는데 몸이 마다한다. 그래서 배려심 많은 하늘이 내가 집을 비울 때만 우리 동네로 비를 보내는 모양이다. 

 

빗소리는 추억을 소환한다. 춥고 쓸쓸하고 걱정되고 무섭고 외로운 기억이다.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시점은 어디쯤일까. 어떤 기억은 꿈인 듯하고 어떤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여 어제 일인 듯하다. 나이가 든 지금도 간간이 꿈에 보이기도 하고 꿈속의 나는 여전히 힘없는 어린아이여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젠 말끔하게 멎은 비처럼 내 안에 내리는 비도 개었으면 좋겠다. 

 

2020년 10월, 김정숙 시인이 우리 집 앞에 화분 두 개를 갖다 놓고 가셨다. 분홍색과 흰색 무궁화였는데 가지가 얼마나 가늘고 말랐던지 이게 살아날까 싶을 정도였다. 10월이 심는 시기로는 적기라 하여 땅으로 옮겨 심었다. 분홍색은 안타깝게도 백 년 만에 찾아온 한파를 견디지 못해 죽었고 흰색은 살아나 작년에 꽃을 피웠다. 그 무궁화는 30여 년 전 라디오코리아 원창호 씨가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어느 날 그분이 방송에서 꺾꽂이한 무궁화를 나눠준다는 소리를 듣고 김정숙 시인이 갔는데, 이미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어서 간신히 받아왔단다. 성냥개비보다 조금 긴 가지 두 개를 얻어와 기른 게 잘 자라서 이미 여러 집에 분양해 주었고 마침내 우리 집까지 온 역사와 전통이 있는 꽃이다.

 

이듬해에 화원에 갔다가 분홍색 무궁화가 들어왔길래 사서 그 자리에 다시 심었다. 봄이 되니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잎이 무성해지더니 이틀 전에 꽃이 여섯 송이나 피었다. 뭉클했다. 이국땅에서 보는 무궁화는 꽃이 아니라 가족 같았다. 어쩌면 그리도 곱던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흰색 무궁화도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키도 훌쩍 자랐다. 작년에 몇 송이 피긴 했어도 가지가 너무 여려서 잘 클지 걱정이 되었는데, 이제 괜찮을 것 같다. 낯선 땅에 뿌리내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살아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두 녀석이 비를 맞아 초록초록해졌다. 무궁화 꽃은 이른 새벽에 활짝 피었다가 저녁이 되면 꽃잎을 돌돌 만 채 툭 떨어진다. 하와이 주화인 히비스커스랑 비슷하다. 떨어진 꽃을 말려 차도 끓이고 먹기도 한다는데 아직 해보진 않았다. 무궁화는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뜻을 지녔다. 한그루에서 이삼 천 개의 꽃이 피고 진다 하니 그럴 만도 하다. 무궁화는 강인하다. 어느 땅에서나 뿌리를 내리고 성실하게 사는 우리 민족처럼 잘 자라고 꺾꽂이해도 번성하니 국화가 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비를 맞았으니 나도 무궁화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

 

박인애

시인,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게 현금을 소지하고 비행기를 탈 때가 있다.비즈니스는 Texas에 있는데 물건을 매입하는 곳이 캘리포니아에 있다면 물품 대금을 직접 가서 현금으로 지불하는 경우다.지난달 달라스에서 사업을 하는 A 씨가 현금 2만 달러를 소지하고 DFW …
    세무회계 2022-08-12 
    연일 100도가 넘는 날이 두 달이 되고 보니, 남아나는 채소가 없다. 호박잎은 진즉에 누렇게 돼버렸고, 깻잎은 잎 가장자리부터 타들어가 누가 일부러 말아 놓은 것 같다. 오이도 역시 폭염에 줄기째 시들어 버렸고, 근대와 갓은 휴가를 다녀와서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화 2022-08-12 
    안녕하세요! 오늘은 저희 한국사람이 주로 먹는 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먹는 음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식당을 가서 파스타를 주문하면 생각보다 빨리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오늘 그 비밀을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꼬들꼬들한 면, 푹 익은 면 …
    건강의학 2022-08-12 
    연일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폭염으로 인해서 우리 몸은 적정 체온을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 몸 속 에너지를 많이 쓰게됩니다.때문에 아무리 시원하게 에어컨을 켜 놓아도 체력이 떨어지고 나른한 느낌이 든다면 우리 몸에 에너지를 채워 주는게 좋습니다. 여름에 복용하면 좋…
    건강의학 2022-08-05 
    바다 건너 고국에서는 중국이 현 윤석열 정부에게 전임 문재인 정부가 채택한 사드3불  정책을 고수하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 이른바 사드 3불 정책은 1) 사드 추가 배치 불가 2)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방어체계 불참 3)한미일 3각 군사 동맹을 뜻한다. 중국은 약속을 …
    세무회계 2022-08-05 
    키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요인이 되고 있다. 키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의 성장의 약 80%는 환경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고, 20% 정도는 유전적인 요인이 작용한다고 보고되고 있다. 즉, 키…
    건강의학 2022-08-05 
    아침마다 혼자 동네 한 바퀴씩 돌던 남편이 일요일 아침만 되면 나를 일으켜 세우느라 해가 오르기 전부터 법석을 떤다. 뜨거워지기 전에 공원 산책을 하자는 것이다. 40여 일이 지나도록 그렇다 할 비도 내리지 않고 연일 세 자리 숫자 기온이 이어지면서 심신의 진이 빠졌다…
    문화 2022-08-05 
    구독자 여러분. 오늘은 지쳐있는 우리의 육체에 힘을 주는 에너지 드링크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에너지 드링크 하면 박카스를 빠뜨릴 수 없는데요. 박카스라는 말과 에너지 드링크라는 단어가 혼용되어서 쓰일만큼 박카스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음료입니다…
    건강의학 2022-08-05 
    월가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가 전하는 우리가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들아홉 살에 완전히 시력을 잃은 1급 시각장애인, 하버드와 MIT에서 공부한 명문대 졸업생, JP모건과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에서 20년 넘게 일해 온 베테랑 애널리스트, 세계 최초의 시…
    부동산 2022-08-05 
    달력에 표시 해 놓고 손꼽아 기다리던 가족 여행을 떠나면서 여권과 비행기표 그리고 가방을 챙기고 빠트린 것이 없는지 돌아 보면서도 많은 경우 지나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보험이다. 만약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아프다면 여행중에 가방이라도 분실된다면 렌트한 자동차를…
    보험 2022-07-29 
    엊그제 2022년이 시작된 것 같은데 벌써 8월이다.   2년의 코비드 시국을 거치면서 세계 각국의 은행들이 엄청난 규모의 돈을 풀어 인플레이션의 우려가 있었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곡물값과 오일 부족을 기점으로 이제 인플레이션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
    세무회계 2022-07-29 
    TMT(Thirty Meter Telescope), 직경30미터짜리 거대 천체망원경이 하와이 주 ‘Big Island’에 있는  마우나 케아 정상에 설치된다고 한다. 직경이 30미터나 되는 망원경이라니 상상하기 어렵다. 수많은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벅…
    문화 2022-07-29 
    유난히 무더운 여름의 7월이 지나갑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에는 체력이 빠지고 기력이 없어져 생활의 활력이 떨어지곤 합니다. 우리나라는 초복, 중복, 말복 이렇게 가장 덥다는 삼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오늘은 그에 어울릴만한 보양식 ‘장어’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건강의학 2022-07-29 
    평균 기대수명(83세)이 늘어나면서 암에 걸릴 확률은 약 38%로 추정된다. 암은 아직까지 완치가 어려운 질환이지만 조기에 발견한다면 생존 확률을 극대화할 수 있어 조기 진단이 필수적이다.  암의 조기진단을 위한 암종별 가장 합리적인 최적의 검사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
    건강의학 2022-07-22 
    지난주에는 2022년도 시즌 PGA 골프 경기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로 영국 스코트랜드 세인트 앤듀루스에 위치한 골프의 메카로 알려진 올드코스에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출전한 디오픈이 거행 되었다. 총상금이 1,400만 달러인 메이저 대회로 올해가 150번째라고 한다…
    세무회계 2022-07-22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