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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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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문학 댓글 0건 조회 2,780회 작성일 20-01-17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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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홀리데이는 끝이 났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리셋 버튼도 이미 눌렀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반짝반짝 덩달아 마음도 달뜨게 했던 크리스마스 장식도 모두 거둬지고 나니 세상이 다 정돈된 듯 조용해졌습니다.

연이틀 불이 꺼져 있던 우리 집 크리스마스트리를 정리합니다. 매년 몇 개씩 늘어나 제법 많은 장식을 하나씩 내리면서 또 다시 일 년을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루하루 일력을 떼어내며 뚜벅뚜벅 걸어가야겠지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요. 반세기를 살았는데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매일매일을 견뎌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그냥 되는대로, 때로는 할 수 있는 만큼의 공을 다 들여서 말입니다. 6일을 견뎌내면 고맙게도 하루라는 선물 같은 시간이 주어지고 지칠 만하면 빨간 공휴일이 찾아오고 그러다가 이제는 특별할 것도 없는 특별한 날들이 구름다리처럼 기다리지요. 그렇게 하루하루 건너다보면 일 년이란 시간이 또 지나가겠지요.





인간이란 존재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태어나면서부터 혼자일 수가 없지요. 그래서 더 외로운가 봅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라는 우리에 갇혀 평생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요. 그 관계가 어떤가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내가 내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게 아니기에 더 힘이 드는 것이지요.

나만 잘한다고 해서 관계가 다 원만하게 되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나이를 한 살 더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오래된 관계가 역시 좋다는 것입니다.

볼 것 다 보고 보여줄 것 다 보여준 그런 관계. 새삼 새로운 모습을 보고 또 보여줘도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는 그런 관계가 나무랄 데 없지요.





그렇게 힘든 관계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오래 이어지는 좋은 관계가 있으니 살겠지요. 재지 않고 따지지 않고 나눠주는 마음이 있으니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겠지요.

김밥 두 어줄 들고 오랜만에 찾아와 안부 챙기는 친구가 있다는 건 행복입니다. 새해를 맞았으니 함께 기도하자고 불쑥 찾아오신 목사님의 기도 소리는 또 어떻고요. 일부러 찾아와 새해 인사를 하는 손님들의 해맑은 미소는 축복입니다.

왜 그랬냐고 꾸짖기보다는 저녁이나 먹자고 오히려 위로해주는 친구가 있으니 오늘을 견디겠지요.





지난가을 뉴욕 문학여행 길에 만났던 로드 아일랜드에서 부부동반으로 온 시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김미희 시인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참 씩씩해요.”

이틀 동안 버스 뒷좌석에 앉게 되어 이동하는 내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냥 나름대로 혼자서 그 시간을 견디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씩씩하게 보였던가 봅니다.

사람은 항상 혼자서만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가끔 홀로 있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런 이유로는 참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어쩌다가 만나 함께한 여행자들 속에서 나를 바로 볼 수 있었고 내 영혼의 투명도를 가늠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외롭고 쓸쓸했는데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알게 되었지요. 잘 모르는 사람들 속에 있었으니 의식할 필요도 없었고 간섭을 받지도 않았으니 나름 견뎌냈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이 오히려 갚진 경험이 되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같은 이유로 만나 같은 목적을 가지고 떠난 여행에서 저마다 다른 이유를 만나고 돌아왔을 거로 생각합니다.

마치 다 같이 새해를 맞아 모두 잘살아 보겠노라는 같은 희망을 품고 떠난 한 해의 여행에서 저마다 다른 이유를 품고 돌아온 것처럼요.





새해가 오면 누구나 하는 계획이란 걸 올해도 거르지 않고 또 해봅니다. 계획이란 걸 하면서 늘 그렇듯 후회란 것을 먼저 합니다. 잘 살았건 못 살았건 후회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후회한다는 것은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의 다른 표현입니다.

나는 몇 점짜리였을까. 몇 점짜리 엄마였을까. 몇 점짜리 아내였을까. 몇 점짜리 친구였을까. 엉터리로 살았습니다. 허점투성이였습니다. 일하며 열심히는 살았으니 겉으로는 그럴싸했을지 몰라도 속 빈 강정이었습니다.

좋은 엄마인 척 잔소리 안 하며 직무를 유기했습니다. 이해한다는 미명 아래 눈 질끈 감고 넘긴 적도 많았습니다. 신중을 앞세워 침묵으로 관계를 정리한 적도 있습니다.

똑바로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그저 허우적거리다 지친 발자국만 남았을 뿐입니다.





다시 큰 마음 먹고 떠나는 2020년 여행은 시시껄렁한 이웃과 일상의 타성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일요일이라 해서 예전처럼 마냥 누워있지 않기로 했습니다. 마냥 게으르게 누워서 책을 뒤적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마냥 누워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릴없이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을 꺼내 들추면서 나를 들볶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보다 나을 것 없고 내게 알맞은 길벗이 없거든 차라리 혼자서 갈 것이지 어리석은 사람과 길벗이 되지 말라”는 법구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새기기로 했습니다.





한 마디 사례도 없는 그 허기진 다 저녁때엔



마른미역 자르듯 가볍게 말고삐를 비틀던 그 사람이

생각나

셰익스피어를 향해

인생은 연극 맞는 거냐고 목울대 울린다





머릿속은 불어버린 미역으로 가득 흐물거리지만

마음은 자꾸 마른 잎 쪽으로 옹그리며

바삭바삭 낡은 긴장을 향한다





가슴이 뛰고

얼굴은 뜨거워지고

이럴 땐 참으로 절묘하다 싶게

친구의 검지 끝은 내 전화번호를 콕콕 찍으며

저녁이나 먹자고 한다





푹푹 끓인 외로움 저 밑바닥까지 드러나게

후룩후룩 삼키는 대사

역시 너는 연극배우야

친구는 웃는다





맞다

최상의 연기는

저녁을 먹는 일이니





김미희, (저녁이나 먹자고) 전문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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