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달라스가 붉게 물이 들고 있습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admin
문화 댓글 0건 조회 3,395회 작성일 19-11-15 11:44

본문


늦게까지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나봅니다. 일어나보니 컴퓨터 위에 하트 모양의 붉은 단풍 한 잎이 놓여있습니다. 물러가지 않을 것 같던 달라스의 폭염도 가을비에는 당할 수가 없나 봅니다.

며칠 사이에 거리는 붉게 물이 들었고 우리 집 앞마당에는 단풍 든 물푸레 나무가 아름답습니다. 황금빛 조각달들이 가을 아침 하늘에 가득합니다.

매일매일 기다리더니 남편은 벌써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단풍이 든 나무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나 봅니다. 이 낙엽은 어디에서 어떻게 남편의 눈에 들어 내게 온 걸까요.

엄지손가락만 한 낙엽을 보고 있자니 고단한 내 몸을 보는 것 같아 물푸레 나무 황금빛 탄성도 사라지고 우울해집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얼마나 가슴 졸였으면 제대로 크지도 못한 걸까요. 벌레한테 먹히고 비바람에 찢기고 패이면서 하트모양이 될 때까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온갖 힘든 상황을 견디고 나면 못난 모습이라도 누군가의 눈에 들 수 있을 거라 생각이나 했을까요.





기다리던 일요일이지만 늦장을 부리고 있을 여유가 없는 날입니다. 올해로 4회째 열리는 코리안 페스티발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모내기 시연에 필요한 농민복과 함께 사용될 머리띠와 머릿수건에 이어 마지막으로 허리띠를 만들어 4시까지 연습장으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어젯밤에 천을 사다놓았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가게에 나와 자르고 박아 뒤집고 다리기까지 4시간이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오산이었습니다. 어딘가에서 단풍물이 흠뻑 들어 있을 남편에게 SOS를 쳤습니다. 고맙게도 근처에 있어서 금방 달려와주었습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나는 연습장을 꽉 채운 사람들로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이들부터 어른, 장애우까지 우리 한인 뿐만 아니라 타민족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모두 한국에서 급조해 온 농민복으로 갈아입고 여자는 머릿수건을, 남자는 머리띠를 하고 양손에는 벼 포기를 들고 ‘옹헤야’ 노래에 율동을 맞춥니다.

코리안 페스티발 3회를 하는 동안 이곳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돕지 못해 늘 미안했습니다. 행사가 토요일에 있으니 가게 문을 닫은 저녁에나 들러 행사가 끝나면 청소하는 정도 밖에 도울 수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올해는 아예 가게 문을 닫고 아침부터 참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미력하나마 재능기부도 할 수 있어 기쁩니다.





한 번도 모내기를 해보기는 커녕 구경도 못 해본 사람들이 많을텐데 몇 번이고 반복되는 율동에 얼굴이 붉게 단풍처럼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타민족 친구들도 음악에 맞춰 율동을 익히느라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농민복이 불편할텐데도 싱글벙글합니다.

보고 있자니 어렸을 때 모내기 하던 생각이 났습니다. 모내기나 추수할 때는 늘 잔칫날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엄마는 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미리미리 김치를 담그고 감주를 만들고 도라지를 캐서 다듬었습니다.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일하러 온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전부인 일꾼들에게 담뱃갑을 돌리고 새참이 되면 막걸리에 국수나 부침개를 만들어 머리에 이고 갑니다. 물이 찰랑거리는 논에 일렬로 나란히 서서 양쪽에서 팽팽하게 잡아주는 모 줄에 맞춰 모내기 하는 광경은 일품이었습니다.

큰 가마솥에 밥을 하고, 무 숭숭 썰어넣고 오징어 찌개도 하고, 기름 둥둥 뜬 고깃국도 끓입니다. 오이 넣고 매콤시큼하게 무친 도라지 홍어회 무침과 풋고추 썰어 넣은 갈치조림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돕니다.

음식을 담은 고무대야를 똬리 받쳐서이고 힘겹게 일어서던 엄마가 눈에 선합니다. 한 손은 머리에 인 고무대야를 잡고, 한 손은 국이 가득 담긴 들통을 들고 앞서가는 엄마 뒤를 숭늉 주전자를 들고 흥얼대며 따라가던 나는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들 밥은 또 왜 그렇게 맛있는지요.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을 큰 소리로 불러 막걸리도 음식도 나눠 먹으니 동네잔치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점심이 끝나고 다시 새참을 챙기고 나면 저녁이 됩니다.

어둑어둑 해지면 일꾼들은 냇가로 가서 씻고 대청마루에 차려놓은 저녁을 시끌벅적하게 먹습니다. 술기운이 거나해진 일꾼들이 돌아가면 엄마는 수돗가에 앉아 큰 고무대야 가득 설거지를 하고 봄밤은 고단하게 깊어갑니다. 이젠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아마 시골 농촌에서도 이런 풍경은 볼 수 없을 겁니다. 다같이 돌아가면서 거들어주던 ‘품앗이’라는 아름다운 용어도 잊히지는 않았는지 모릅니다.





모내기 시연 연습이 끝나고 다음 팀 연습을 준비하는 동안 또 다른 팀은 건물 밖에서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아이돌 두 팀과 국악협회에서 50여 명이 출연할 예정이지만 달라스에서 준비하는 나머지 45개 팀들은 거의 아마추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차질없이 발휘하려고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게 아니고 기쁜 마음으로 동참해서 그런지 하나같이 단풍처럼 곱게 물든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아침 10시 30분부터 시작해서 밤 9시 30분까지 11시간 동안 무대가 채워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4회째 기획하고 준비하느라 애쓰신 한 분 한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행사가 풍성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재능기부도 하고 아낌없이 후원해주신 소중한 분들도 잊어선 안 되겠지요. 부디 올 행사도 물푸레나무 황금빛 이파리처럼 파도를 일으키길 기원해봅니다. 그래서 4회가 5회가 되고 10회, 20회가 되어서 다음 세대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다 같이 한마음이 되어야겠습니다.
코리안 페스티발은 달라스 한인 모두의 잔치입니다. 우리가 모두 주인입니다.





가을 축제 / 김미희





가을비 그치고

하늘은 맑고

만국기 펄럭이고

천막들이 저마다 들썩이는 일일장 섰다





떡메 내려치는 소리

고소한 참기름 냄새

가슴에 익은 풍악소리에

물 위에 떠돌던 이민 살이 가슴들

하나둘 모여들어

홍시 따던 장대로

때마침 가까이 내려온 슈퍼 문(super moon)

저마다 톡톡 건들어 본다





막걸리 한 사발에 어깨가 들썩

이제는 낯선 사람 하나 없다

얼쑤, 신명나게 한 가락 뽑아대고

까르르 웃음소리, 폭죽 소리에

쿵쿵 뛰는 심장 소리에

달라스가,

붉게 물이 들고 있다

단풍이 들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늦게까지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나봅니다. 일어나보니 컴퓨터 위에 하트 모양의 붉은 단풍 한 잎이 놓여있습니다. 물러가지 않을 것 같던 달라스의 폭염도 가을비에는 당할 수가 없나 봅니다. 며칠 사이에 거리는 붉게 물이 들었고 우리 집 앞마당에는 단풍 든 물푸레…
    문화 2019-11-15 
    매사추세츠의 가을풍경을 맨 처음 본 것은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우가 주연한 공전의 히트작 ‘러브 스토리’란 영화에서 였다. 단풍잎이 떨어지는 하버드 캠퍼스와 동부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던 그 영화를 보며, 언젠가는 나도 저 풍경 속으로 들어 가보리란 꿈을 가졌던…
    문화 2019-11-08 
    김수자 하와이 거주 / 소설가 하와이에서 생긴 일(18) “하와이 음식 먹을래?” “먹어봤잖아. 그 식당, 레이가 일하는 식당에서 포이를 권했잖아. 하와이 토란을 이겨서 만든 음식이라며 레이 아버지가 만들어주기도 했고. 솔직히 말해서 포이가 …
    문화 2019-11-01 
    [ 문화산책 ] 시인의 작은 窓 개, 고양이는 물론 돼지, 새, 햄스터 토끼에 거북까지 키우는 동물애호가 A가 ‘하쿠나 마타타 Hakuna Matata’티 셔츠를 입고 라이온 킹 OST를 사오자 내 작은 둥지는 라이언 킹의 이야기로 뜨거웠다. 영화관에 앉아서 아프리카…
    문화 2019-10-25 
    김미희 시인 / 수필가 “사람도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 하거늘”로 시작되는 미 동부 한인 문인협회 황미광 회장의 환영사는 30년을 지켜온 문협역사를 자랑하고도 남았습니다. 한 마디로 개성 강한 작가들로 구성된 군단을 30년 동안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겸손…
    문화 2019-10-22 
    [ 문학에세이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김미희 시인 / 수필가 쿵! 지구의 자전이 멈췄습니다. 진지하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큰아이의 말에 동전의 양면 앞에서처럼 심장을 한 움큼 뜯긴 새처럼 서 있었습니다. 나만의 북극성이 궤도를 바꾸겠다는 전언이었습니다…
    문화 2019-09-20 
    한 십년 전쯤 일이다. 아이들 방학이 시작 된 오월 말쯤 언니와 나는 엄마를 모시고 한국엘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며칠 묵기로 한 동생의 집에 갔을 때 동생이 우리를 썩 별로 환영하지 않는 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의 방문기간이 중학생 조카의 중…
    문화 2019-09-13 
    [꽁트릴레이 ] 한인작가 꽁트 릴레이 41 하와이에서 생긴 일(16) 이 대결은 부당하다. 즈네들한테는 아케보노가 영웅인지 몰라도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스모의 ‘스’자도 모르는 사람에게 스모로 대결을 하자고? 이 불공평한 대결에 레이가 있다. 레이, 나의 레…
    문화 2019-09-06 
    [꽁트릴레이 ] 한인 작가 꽁트 릴레이 40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준우가 고개를 들고 보니 ‘인문학강좌’라는 팻말이 걸린 출입문이 바로 보였다. 낭만클럽을 찾느라 애쓸 필요도 없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니 입구 테이블에 앉은 여자가 상큼 웃으며 고개를 까딱 했다. 아하,…
    문화 2019-08-30 
    [ 문화산책 ] 시인의 작은 窓 한국에서 온 남편의 친구는 내슈빌에서 목회하는 사위와 딸을 삼주 방문 후 화요일 귀국한다고 했다. 목회자인 친구를 만나고 싶은 남편의 마음은 충분히 알지만 물리치료 받으며 장거리 로드트립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토요일 퇴근 길 지인의…
    문화 2019-08-23 
    [ 문학에세이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마실 나간 잠이 영영 달아났나 봅니다. 뒤 뜰 콘크리트 바닥에 자리를 펴고 베개를 베고 누웠습니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모릅니다. 오늘따라 별이 유난히 많습니다. 손이라도 뻗으면 닿을 듯합니다. 스테파니 아가씨와 양치…
    문화 2019-08-16 
    박혜자의 세상 엿보기’(peek through the window) 어린 시절 순천에서 일본사람들이 살다 간 적산가옥에서 잠시 산 적이 있었다. ‘옥천’이라는 순천 시내를 관통하는 냇가가 있는 저전동이라는 동네였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를 했던…
    문화 2019-08-09 
    지난 주와 이번 주에 라이스 대학에 조기 지원한 학생들의 인터뷰를 많이 도와주었는데, 그러다 보니 이 내용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이번 칼럼은 ‘동문 인터뷰’ 라는 주제로 그 목적과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대부분의 명문 사립대학들은 대입 심사 과정…
    교육상담 2019-11-22 
    이번 칼럼에서는 대학입시에 관하여 역사상 깊게 뿌리 박고 있는 Affirmative Action(어퍼머티브 액션)과 다른 몇 가지 정책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자 한자. 우선, Affirmative Action의 배경에 대해 좀 더 이해한다면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교육상담 2019-10-25 
    본격적으로 2020 대입 원서 시즌이 시작됐다. 가장 까다로운 과정이 에세이 작성인데 공통지원서(CommonApp)의 에세이는 손쉽게 일문일답하는 형식이 아니다. 보다 성숙한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래서 부모나 멘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시간을 두고 함…
    교육상담 2019-09-27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