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허망과 희망 사이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35회 작성일 25-09-26 06:43

본문

 박인애 (시인, 수필가)


 

 호숫가를 거닐다 돌아오는 데, 잔디밭과 보도블록 틈새에 종이가 꽂혀 있었다. 반으로 접힌 모양새가 지폐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람에 뒤척이던 종이가 속을 열어 보였다. 온기가 사라진 파워볼 복권이었다. 당첨되었다면 귀한 대접을 받았을 텐데, 버려진 걸 보니 떨어진 게 틀림없었다. 누가 버렸는지, 어디서 날아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흙먼지를 뒤집어쓴 꼴이 추레했다. 쓰임을 잃은 순간 외면당하는 건 사람이나 종이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공돈을 못 주워서는 아닌데, 마음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집 아줌마가 차고 앞에 세워 둔 차에 허겁지겁 올라타더니 시동을 걸었다. 우리를 보자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복권을 사러 간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달떠있었다. 그녀는 필리핀계 이민자다. 동네가 형성되던 십여 년 전, 이곳에 집을 짓고 들어와 살았으니,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다. 허허벌판에 집들이 하나둘 늘고, 옆집에 아시아 사람이 들어오니 더없이 반가웠다. 우리는 오랜 세월 음식을 나누고, 꽃씨를 나누고, 집을 비울 때면 우편물을 맡아주는 이웃사촌으로 정을 쌓아왔다. 요즘은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며 모난 세월을 함께 건너는 중이다.



 집에 들어선 딸이 남편에게 복권 이야기를 했다. 거실에서 뒹굴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추첨이 세 시간밖에 안 남았으니 서둘러야겠다며 차 키를 챙겼다. 그는 착한 사람이 번호를 골라야 붙는다고 굳세게 믿는다. 처음엔 내게 선택권을 주었는데, 신통치 않았는지 어느 순간 딸에게 임무가 넘어갔다.


  남편은 매주 복권을 산다. 뭔가에 홀려 더 사는 날도 있었지만, 보통 한 장을 산다. 붙을 놈은 한 장만 사도 붙는다면서 자기만의 철학을 고수한다. 당첨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복권을 손에 쥔 순간만큼은 그에게도 다른 세상이 열리는 듯 보였다. 소액이 당첨된 적은 있지만, 잭팟의 행운은 늘 그의 곁을 비껴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복권을 산다. 로또 한 장에 희망을 걸고 수시로 주문을 외워보는 거다. 붙으면 한 방에 고생 끝이라며 너스레도 떤다. 정말 그런지 지켜볼 참이다.


  나는 ‘한방 주의’보다 성실한 걸음걸음이 좋다. 당첨 뒤에 삶이 무너지는 사례를 방송에서 보아왔다. 갑자기 생긴 큰돈은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이 복권을 사는 한, 내 삶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나도 복권을 산 적 있다. 불법체류 신분으로 힘겹게 살던 지인을 돕고 싶어서였다. 오바마 행정부가 다카(DACA) 제도를 시행했던 시기였다. 일정 비용을 내고 절차만 밟으면 아이들이 합법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지인은 영주권 사기로 가진 돈을 모두 잃었다. 도와주고 싶은데, 나 역시 가난해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복권을 샀다. 혹시라도 당첨되는 기적이 온다면, 지인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 주고 싶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지켜보았다. 꽝이었다. 허망은 떨어진 복권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나의 빈 주머니와 무력한 마음에서 온다는 걸 그날 깨달았다. 쓰린 기억은 쓴 추억을 남긴다.


 텍사스 복권에는 “Thanks for supporting Texas Education and Veterans”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텍사스 복권 수익금은 주 교육기금과 참전용사 지원에도 쓰인다고 하니, 결과와 상관없이 의미 있는 기부를 한 셈이기도 하다. 그래서 혹자는 복권은 ‘희망을 사는 행위’이자 ‘자발적 세금’이라고 말한다. 희망을 사려고 돈을 썼지만, 동시에 공동체를 지탱하는 데 미력하나마 힘을 보탰으니, 전적으로 허망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애써 떨어진 마음을 위로하고 합리화해 보는 거 아닐까.


  미국 동부 시간으로 밤 10시 59분에 파워볼 추첨을 시작한다. 숫자가 하나하나 뽑힐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발!’을 외치며 보고 있을까. 긴장감도 전염이 되는 모양이다. 2불짜리 복권 한 장에 희망을 건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애잔하다. 그 간절함을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지난주까지 사람들을 긴장케 하던 파워볼 잭팟이 드디어 터졌다. 텍사스와 미주리에서 복권을 산 두 사람이 당첨금을 나누어 가졌다. ‘$1.787 billion’이면 ‘0’이 대체 몇 개나 붙은 걸까, 한국 돈으론 환산하면 ‘0’은 더 많을 것이다. 쓰잘머리 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나와 무관한 상금에 공이 몇 개인지가 왜 궁금한 걸까. 잭팟 당첨금은 빌리언에서 밀리언 단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서민에겐 여전히 큰돈이다. 남편은 이번 주에도 복권을 사러 갈 거라고 했다. 한 배를 탔으니, 허망과 희망 사이를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복권의 진정한 행복은 살 때 있는 듯하다. 복권을 손에 쥐고 당첨의 순간을 상상하며 척박한 세상에서의 고단한 삶을 잊고 아주 잠깐이지만,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희망의 무게를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희망의 씨앗을 품고 산다. 복권보다 더 확실한 희망은 무엇일까. 사람은 동전의 양면처럼 허망과 희망 사이를 걷는 존재다. 문득 허기가 몰려왔다. 옆집 아줌마가 준 자색 고구마 찰떡을 한입 베어 물었다.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 그 무형의 잭팟이야말로 진짜 잭팟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린 이미 당첨자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  가끔은 삶이 양 어깨를 짓눌러 주저 앉고 싶을 때 찾아가는 산이 있습니다.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쉬지 않고 달려가는 대륙의 창가는 어느덧 이곳이 강원도 깊은 …
    문화 2025-09-26 
     박인애 (시인, 수필가)  호숫가를 거닐다 돌아오는 데, 잔디밭과 보도블록 틈새에 종이가 꽂혀 있었다. 반으로 접힌 모양새가 지폐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람에 뒤척이던 종이가 속을 열어 보였다. 온기가 사라진 파워볼 복권이었다. 당첨되었다면 귀한 대접을 받았을…
    문화 2025-09-26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이제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때…
    세무회계 2025-09-26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지난 7월, 미국 코카콜라에 앞으로는 액상과당 대신 설탕이 들어간다는 기사가 나왔다. 놀랍게도 트럼프 대통령…
    문화 2025-09-26 
    조나단 김(Johnathan Kim)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졸업- 現 핀테크 기업 실리콘밸리   전략운영 이사화이트칼라 입문직은 줄고, 기술직 수요는 확대AI가 흔드는 전통적 성공 공식지난 수십 년간 미국 사회에서 성공의 공식은 비교적 단순했다. 명문대 …
    교육상담 2025-09-26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세상의 푸르름이 스모키 마운틴 한곳에만 내려 앉은 것 같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끝없이 흘러 보내도 짙푸른 스모키 마운틴의 색깔을 희석시킬 수는 없습니다. 잠시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에 반사된 한 여름의 석양의 빛이 잠시나마 계절의…
    문화 2025-09-19 
    공인 회계사 서윤교미국에 거주하거나 사업을 운영하는 한인 동포들에게 세금 보고는 매년 반복되는 중요한 의무다. 하지만 복잡한 세법 구조와 다양한 신고 기한 때문에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있는데 특히 개인, 법인(C Corporation), S Corporation, 파트…
    세무회계 2025-09-19 
    엑셀  카이로프로틱 김창훈 원장 Dr. Chang H. KimChiropractor | Excel Chiropracticphone: 469-248-0012email: [email protected] MacArthur Blvd suite 103, …
    건강의학 2025-09-19 
    ​ 고대진 작가◈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순대…
    문화 2025-09-19 
    김재일 (Jay Kim) 대표현 텍사스 교육청 (TEA) 컨설팅전직 미국 교육부 (U.S Department of Education) 컨설팅전직 텍사스 공립학교 교장 [들어가기 전] 지난 칼럼 이후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께서 문의를 주셨습니다. 이번 주 칼럼을 …
    교육상담 2025-09-19 
    보증보험(Bond)이광익 (Kevin Lee Company 대표)사람들의 살아온 옛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유복하던 가정이 보증을 잘못 서주는 바람에 재산을 차압 당하고 갑자기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오래 전에…
    보험 2025-09-19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Great Smoky Mountains)은 미국에서 가장 늦게 1934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지만 좋은 기후 조건과 사시사철 변하는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은 곳이어서 미국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문화 2025-09-11 
    에밀리 홍 원장결과가 말해주는 명문대 입시 전문 버클리 아카데미 원장 www.Berkeley2Academy.com 문의 : [email protected]새 학기가 시작되며 미국 대학 입시는 본격적인 시즌을 맞이했습니다. Common App이 열리고 10월부터 E…
    교육상담 2025-09-11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해마다 여름의 끝자락인 8월 말, 엘에이에서 열리는 미주 문학캠프는 미주 문인들의 가장 큰 축제이다. 캘리포니아는 물론, 알라스카, 하와이, 텍사스 등 미 전지역에서 문…
    문화 2025-09-11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조지아주 엘라벨(Ellabell)에 위치한 현대-L…
    세무회계 2025-09-11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