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숨통 트이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1,364회 작성일 23-03-03 10:47

본문

겨우내 바짝 말라 세상과 단절한 듯 보이던 무궁화 가지에 움이 트기 시작했다.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대체 봄기운을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자연의 조화가 참으로 신비롭다. 

며칠 전, 빈 가지에 조그만 새순이 여기저기 솟아오르더니 작은 잎새들이 앞다투어 얼굴을 내밀었다. 어느새 가지가 빼곡하다. 다투지 않고 그들만의 보폭을 유지하면서 봄을 맞는 모습이 조화롭다. 봄바람이 불 때마다 팔랑거리는 작은 잎새들이 마치 날갯짓하는 나비 같다. 하늘이 내리는 물과 빛으로 강인하게 견디며 살아내는 모습이 새삼 대견하다. 

 

날이 따뜻해져서 다시 호숫가를 걷기 시작했다. 그곳에도 봄이 한창이었다. 분수에서 뿜어내는 물줄기에 봄 햇살이 닿자 거짓말처럼 눈앞에 무지개가 생겼다. 힘들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해가 자리를 옮길 때까지 오래 서 있었다. 오리와 거북이가 돌아온 호수는 활기가 넘쳤다. 짝을 짓는 계절인지 오리들은 암수가 뒤뚱거리며 다정히 거닐기도 하고 바짝 붙어 앉아서 졸기도 했다. 거북이들이 잔디밭 위에 엎드려 넓은 등을 말리는 풍경만으로도 평화로워 보였다. 물가에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산책로에 있는 것보다 생기가 돌았다. 라일락도 그랬다. 물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무의 단면을 보면 빈틈이라곤 없고 꽉 막힌 듯 보이는데 대체 어디로, 무슨 힘으로 그렇게 물을 빨아올리며 살아남는 것일까. 식물도 사람의 혈관처럼 물이 오르는 통로에 찌꺼기가 쌓이거나 막히면 죽는 걸까. 호숫가를 돌며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얼마 전, 집에서 쓰는 정수기에 문제가 생겼다. 누수 문제로 세 번이나 서비스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았다. 미국 회사였다면 새 기계로 교체해주었을 텐데, 한국 회사는 사람을 보내 계속 고쳐주기만 했다. 고치고 난 후에도 얼마 안 가서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걸 보면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는 기계를 꺼버리면 되니 괜찮지만, 외출했을 때 물이 새면 마루나 가구가 젖어 문제가 커지지 않겠냐고 교체를 부탁했더니 자기 회사에 보험이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괴변만 늘어놓았다. 

불안불안하던 정수기가 결국 사고를 쳤다.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흘러나왔다. 전처럼 졸졸 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전원을 끄고 또다시 전화를 했다. 집에 아무도 없었다면 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마지못해 새 기계로 교체해주어 일단락되었으나 직원들의 대응과 태도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원인은 기계가 아니라 호수였다. 가느다란 호수에 석회질이 잔뜩 끼어 통로가 막히니 역류했던 거다. 사람이나 기계나 혈관이 막히면 정상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정수기를 못 쓸 때마다 마트에서 물을 사다 먹었다. 그중 2갤런짜리는 부엌 싱크대 위에 놓고 음식 할 때 사용했는데, 그 물통도 처음엔 잘 나오다가 어느 순간이 되니 졸졸거리며 나와서 불편했다. 원래 그런 건 줄 알고 물통을 기울여 따라 썼는데 어느 날 점자처럼 찍힌 글씨가 손가락에 느껴졌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용 전에 구멍을 뚫으라는 말이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찍혀있었다. 칼로 표시된 곳을 찔렀다. 체증이 내려가듯 트림을 하며 물이 시원하게 쏟아졌다. 물통에도 숨구멍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진즉에 뚫어 주었다면 무거운 물통을 들고 기울여 가며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관심이 없어서 물통과 소통하는 법을 몰랐다. 목욕탕에 샤워기도 같은 이유라는 걸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팔 년간 사용했던 샤워기도 꽉 막혀 속이 속이 아니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사람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근간 잘 통한다고 생각했던 지인과 소통에 문제가 생겼다. 돌아보니 소통이 되어서 잘 지냈던 게 아니라,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지인은 선을 넘기 시작했다. 감사는 없고 모든 걸 당연하다 여겼다. 일방적인 친절이나 배려는 상대를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소통의 통로가 막히면 관계는 소원해진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내 소화 기관에도 문제가 생겼다. 먹는 것마다 내려가지 못하고 역류했다. 오지게 속상했던 모양이다. 이용당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무거웠던 관계를 내려놓으니 숨통이 트였다.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무성해져야 시야에 들어오던 봄이 새롭게 다가왔다. 새봄은 초록이 아니라 연두였다. 나는 왜 봄이 모두 초록이라고 생각했을까. 늘 편견이 오류를 낳았다. 돌아오는 길에 민들레를 만났다. 가장 낮은 곳에서 봄을 제일 먼저 마중 나오는 변함없는 충직함에 감동하였다. 봄 햇살을 한껏 받은 연둣빛 잎새, 노란 민들레가 얼마나 싱그럽던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늘이 내린 물감은 사람이 만들어낸 물감보다 아름답다. 그가 지은 세상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망가져 간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안타깝고 두렵다. 이상기후, 천재지변, 전쟁 등으로 지구가 아프고 사람도 아프다. 흉흉한 뉴스는 가라앉고 좋은 소식만 움텄으면 좋겠다. 104년 전 오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내 나라에도, 우크라이나에도, 튀르키예에도,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땅에도 평화만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이광익 (Kevin Lee Company 대표사업체 장비고장과 보험우리 나라에서 속담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뜻하는 의미는 말 그대로 미리 외양간을 잘 손질하고 튼튼히 하면 자기가 아끼는 소를 잃지 않아도 된…
    보험 2025-06-26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1970년대의 일이다. 한국에 처음으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될 무렵 한국에는 최신형 고속버스가 도입 되었고 그 당시 고속버스 운전사는 아주 특별한 대단한 직업으로 인식이 되었던 시절이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의 희소성의 원칙에 따…
    문화 2025-06-26 
       공인회계사 서윤교                                                  2025년 6월 현재, 미국 상원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도한 새로운 세제개편안, 이른바 'One Big Beautiful Bill Act' (이하…
    세무회계 2025-06-26 
      백경혜 수필가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과 여행을 떠났다.  타지 생활 동안 제대로 된 여행 한번 못했던 아들이 이 길 끝에서 어떤 위안을 얻길 바랐다. 졸업식에 맞춰 다른 가족들이 도착하기 전, 며칠을 내어 스모키 마운틴으로 향했다.  굽이진 산길을 따라 올라가…
    문화 2025-06-26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남아메리카에서 인기 있는 트레스 라체스 케익(Tres Leches Cake)은 이름 그대로 케익에 세 가지 …
    문화 2025-06-26 
    조나단 김(Johnathan Kim)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졸업- 現 핀테크 기업 실리콘밸리   전략운영 이사엘리트 대학 입시의 이면: 성적만으로는 부족하다.미국 상위권 대학 진학 전략, 이제는 ‘클래스 구성’이 관건미국의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려는 한국 …
    교육상담 2025-06-26 
    Ryan Kim (텍사스 인저리)지난 1년간 교통사고 관련 칼럼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전달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전달해 드린 내용들을 잘 숙지하셔서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사고 시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마지막 칼럼에서는 그동안 다룬 핵심 내용을 종…
    법률 2025-06-20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  저는 꽃을 매우 좋아합니다. 마당에 가지런히 심은 각종 꽃으로부터 물가 너머로 들녘을 아름답게 장식한 이름 모를 야생화까지 마음의 한 구석 응어리진 부분을 털어버리고 세상에 영롱한 빛을 품게 하는 오색찬란한 꽃들을 좋아합니다.…
    문화 2025-06-20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 Carrollton, TX 75007고국에서 막 선출된 새로운 대통령과 이곳 미국과의…
    세무회계 2025-06-20 
    엑셀  카이로프로틱 김창훈 원장 Dr. Chang H. KimChiropractor | Excel Chiropracticphone: 469-248-0012email: [email protected] MacArthur Blvd suite 103, …
    건강의학 2025-06-20 
    김미희 시인 / 수필가 감격이란, 오직 자기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에 깊이 몰입할 때 찾아오는 강렬한 감정이라고 합니다. 가깝지만 쉽게 닿을 수 없는 것, 눈에 보이지만 손에 넣기 어려운 순간. 특히 스포츠에는 신기록과 우승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 감격의 순간이 끊임…
    문화 2025-06-20 
    오종찬(작곡가, 달라스한국문화원장)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포트워스 다운타운에서 열리는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는 피아노 콩쿠르중의 하나인 Van Cliburn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다녀왔습니다. 15회 우승자인 ‘선우예권’, 16회 우승자인 ‘임윤찬’ 군의 사진이 콘…
    문화 2025-06-13 
    에밀리 홍 원장결과가 말해주는 명문대 입시 전문 버클리 아카데미 원장 www.Berkeley2Academy.com 문의 : [email protected]​“이 대학에 우리 아이의 합격 챈스는 어느정도 인가요?”아마 대학입시를 앞둔 자녀의 학부모라면 제일 궁금해 …
    교육상담 2025-06-13 
    박인애 (시인, 수필가)  지난 5일, 이지원 선생님이 “미주복음방송, 통일의 소리”라는 코너에 남편과 함께 출연해서 우리 책을 소개했다며 단체카톡방에 링크를 올렸다. 궁금해서 ‘바로 듣기’를 클릭했다. 군더더기 없는 화법으로 얼마나 야무지게 말을 잘하시던지, 엄마 미…
    문화 2025-06-13 
    홍수 피해보험                                          이광익 (Kevin Lee Company 대표)                    홍수 위험 지역에서 많은 강우량으로 인해 홍수가 발생했다고 한다면 그 지역에 위치한 대부분의 주택들…
    보험 2025-06-13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