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숨통 트이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1,488회 작성일 23-03-03 10:47

본문

겨우내 바짝 말라 세상과 단절한 듯 보이던 무궁화 가지에 움이 트기 시작했다.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대체 봄기운을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자연의 조화가 참으로 신비롭다. 

며칠 전, 빈 가지에 조그만 새순이 여기저기 솟아오르더니 작은 잎새들이 앞다투어 얼굴을 내밀었다. 어느새 가지가 빼곡하다. 다투지 않고 그들만의 보폭을 유지하면서 봄을 맞는 모습이 조화롭다. 봄바람이 불 때마다 팔랑거리는 작은 잎새들이 마치 날갯짓하는 나비 같다. 하늘이 내리는 물과 빛으로 강인하게 견디며 살아내는 모습이 새삼 대견하다. 

 

날이 따뜻해져서 다시 호숫가를 걷기 시작했다. 그곳에도 봄이 한창이었다. 분수에서 뿜어내는 물줄기에 봄 햇살이 닿자 거짓말처럼 눈앞에 무지개가 생겼다. 힘들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해가 자리를 옮길 때까지 오래 서 있었다. 오리와 거북이가 돌아온 호수는 활기가 넘쳤다. 짝을 짓는 계절인지 오리들은 암수가 뒤뚱거리며 다정히 거닐기도 하고 바짝 붙어 앉아서 졸기도 했다. 거북이들이 잔디밭 위에 엎드려 넓은 등을 말리는 풍경만으로도 평화로워 보였다. 물가에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산책로에 있는 것보다 생기가 돌았다. 라일락도 그랬다. 물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무의 단면을 보면 빈틈이라곤 없고 꽉 막힌 듯 보이는데 대체 어디로, 무슨 힘으로 그렇게 물을 빨아올리며 살아남는 것일까. 식물도 사람의 혈관처럼 물이 오르는 통로에 찌꺼기가 쌓이거나 막히면 죽는 걸까. 호숫가를 돌며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얼마 전, 집에서 쓰는 정수기에 문제가 생겼다. 누수 문제로 세 번이나 서비스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았다. 미국 회사였다면 새 기계로 교체해주었을 텐데, 한국 회사는 사람을 보내 계속 고쳐주기만 했다. 고치고 난 후에도 얼마 안 가서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걸 보면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는 기계를 꺼버리면 되니 괜찮지만, 외출했을 때 물이 새면 마루나 가구가 젖어 문제가 커지지 않겠냐고 교체를 부탁했더니 자기 회사에 보험이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괴변만 늘어놓았다. 

불안불안하던 정수기가 결국 사고를 쳤다.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흘러나왔다. 전처럼 졸졸 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전원을 끄고 또다시 전화를 했다. 집에 아무도 없었다면 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마지못해 새 기계로 교체해주어 일단락되었으나 직원들의 대응과 태도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원인은 기계가 아니라 호수였다. 가느다란 호수에 석회질이 잔뜩 끼어 통로가 막히니 역류했던 거다. 사람이나 기계나 혈관이 막히면 정상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정수기를 못 쓸 때마다 마트에서 물을 사다 먹었다. 그중 2갤런짜리는 부엌 싱크대 위에 놓고 음식 할 때 사용했는데, 그 물통도 처음엔 잘 나오다가 어느 순간이 되니 졸졸거리며 나와서 불편했다. 원래 그런 건 줄 알고 물통을 기울여 따라 썼는데 어느 날 점자처럼 찍힌 글씨가 손가락에 느껴졌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용 전에 구멍을 뚫으라는 말이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찍혀있었다. 칼로 표시된 곳을 찔렀다. 체증이 내려가듯 트림을 하며 물이 시원하게 쏟아졌다. 물통에도 숨구멍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진즉에 뚫어 주었다면 무거운 물통을 들고 기울여 가며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관심이 없어서 물통과 소통하는 법을 몰랐다. 목욕탕에 샤워기도 같은 이유라는 걸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팔 년간 사용했던 샤워기도 꽉 막혀 속이 속이 아니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사람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근간 잘 통한다고 생각했던 지인과 소통에 문제가 생겼다. 돌아보니 소통이 되어서 잘 지냈던 게 아니라,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지인은 선을 넘기 시작했다. 감사는 없고 모든 걸 당연하다 여겼다. 일방적인 친절이나 배려는 상대를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소통의 통로가 막히면 관계는 소원해진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내 소화 기관에도 문제가 생겼다. 먹는 것마다 내려가지 못하고 역류했다. 오지게 속상했던 모양이다. 이용당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무거웠던 관계를 내려놓으니 숨통이 트였다.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무성해져야 시야에 들어오던 봄이 새롭게 다가왔다. 새봄은 초록이 아니라 연두였다. 나는 왜 봄이 모두 초록이라고 생각했을까. 늘 편견이 오류를 낳았다. 돌아오는 길에 민들레를 만났다. 가장 낮은 곳에서 봄을 제일 먼저 마중 나오는 변함없는 충직함에 감동하였다. 봄 햇살을 한껏 받은 연둣빛 잎새, 노란 민들레가 얼마나 싱그럽던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늘이 내린 물감은 사람이 만들어낸 물감보다 아름답다. 그가 지은 세상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망가져 간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안타깝고 두렵다. 이상기후, 천재지변, 전쟁 등으로 지구가 아프고 사람도 아프다. 흉흉한 뉴스는 가라앉고 좋은 소식만 움텄으면 좋겠다. 104년 전 오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내 나라에도, 우크라이나에도, 튀르키예에도,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땅에도 평화만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Email :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한 2026년에 예정된 2,…
    세무회계 2025-12-05 
     김미희 시인 / 수필가 세월이 흐르면 시간은 더 빠르게 달아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을 기다리던 그 세 달은 학창시절 수학여행 전날처럼 더디고 길었다. 달력을 넘길 때마다 종이 한 장이 아니라 설렘 한 겹이 벗겨져 나가는 듯했고, 비행기표를 예약…
    문화 2025-12-05 
    SANG KIM REALTORREALTOR® |  Licensed in Texas -Century 21 Judge Fite #0713470Home Loan Mortgage Specialist - Still Waters Lending #2426734            …
    부동산 2025-12-05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11월이 지나면서 제법 쌀쌀한 날씨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작년 보다 따스한 날씨가 계속 되어서 그런지 텍사스의 단풍은 아직도 찬란한 그 빛을 세상에 내어놓지 못한 듯 합니다. 그렇지만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듯 잠시 잠시 오…
    문화 2025-12-05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약 2주 전인 11월 14일을 전후로 세계 곳곳에서 오로라가 관측되었다. 오로라는 주로 북극과 남극 가까이에…
    문화 2025-11-28 
     박인애 (시인, 수필가)교수님과 안국동에서 점심을 먹었다. 바로 옆이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인데, 규모가 작으니 둘러보고 가라고 권해주셨다. 서울에 있는 궁궐은 다 가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운현궁이 빠져있었다. 한국에 살 때 그 앞을 수없이 지나갔음에도 비껴갔던 거…
    문화 2025-11-28 
    서윤교 CPA미국공인회계사 / 텍사스주 공인 / 한인 비즈니스 및 해외소득 전문 세무컨설팅이메일: [email protected]최근 미국에서 암호화폐 시장에 큰 변화를 알리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USDC 발행사인 서클(Circle)의…
    세무회계 2025-11-28 
    ​자동차 사고로 인한 불이익 이광익 (Kevin Lee Company 대표)                                                        자동차 충돌 사고의 경우,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수해야 하는 불이익을 경험하…
    보험 2025-11-28 
    조나단 김(Johnathan Kim)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졸업- 現 핀테크 기업 실리콘밸리   전략운영 이사숫자가 바뀌자, 오래된 질문들이 풀리기 시작했다하버드대가 발표한 2029학번 신입생 구성에서 가장 크게 눈에 띄는 변화는 아시아계 학생 비율의 급…
    교육상담 2025-11-28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북극이 찬 기단이 북미로 내려오면서 달라스는 예전의 시간을 되찾은 듯 연일 쌀쌀한 날씨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 온기를 서로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비록 우리의 온기를 다 줄 수는 없지만 …
    문화 2025-11-28 
    《 베일리 보험 》많은 한인들이 경영하는 세탁소와 얼터레이션 또는 슈리페어비지니스들이 있다. 이들 비지니스는 일종의 서비스 업종으로 다른 업종과 달리 이들 사업체에는 많은 고객들의 의류와 구두등을 맡아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근래에는 비교적 큰 금액의 시설 …
    보험 2025-11-24 
    서윤교 CPA미국공인회계사 / 텍사스주 공인 / 한인 비즈니스 및 해외소득 전문 세무컨설팅이메일: [email protected]미국 연방정부의 부분적 셧다운(Shutdown)이 역대 최장 기록을 경신하며 계속 진행 중이다. 이번 셧다운은 단순한 공공서비스 중단을 넘어 …
    세무회계 2025-11-24 
    크리스틴 손, 의료인 양성 직업학교, DMS Care Training Center 원장(www.dmscaretraining.com / 469-605-6035) “CNA 자격증을 따고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그다음엔 어떤 길이 있을까요?”많은 분들이 첫 자격증 이후…
    교육상담 2025-11-24 
    에밀리 홍 원장결과가 말해주는 명문대 입시 전문 버클리 아카데미 원장 www.Berkeley2Academy.com 문의 : [email protected]이제 자녀를 키우는 세대의 중심은 1980년대 초중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 부모 로 바뀌고 있는 시점 입…
    교육상담 2025-11-24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역사와 전통의 이상 문학상 주관사가 바뀌고 난 뒤 출간된 2025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나는 지난 6월 서울 방문길에 사왔다. 사실 내가 사보고 싶은 책은 따로 있었는데, 숙소 부근에 있던 양재동 동네서점엘 갔더니, 정말이지 서적이 별로 없었…
    문화 2025-11-24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