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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백경혜] 너랑 사이좋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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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39회 작성일 24-10-25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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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혜 수필가


이상하게 한 달에 사나흘은 더 고달프고 우울했다. 


돈을 버는 것도, 마트에서 무얼 살까 결정하는 것도, 그 재료들을 다듬어 요리하고, 하루에 세 번 먹는 것을 반복하는 것도 권태로운 노동으로 여겨졌다. 가족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혼자서 많은 일을 감당하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무신경하게도 그들은 희생을 알아주지 않았고, 내 고단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아침에 눈을 뜨면 마음속 컴컴한 좌절의 방 커튼 한 자락을 젖히고 하얀 햇살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어제까지 분명 흑백이었던 것에 빛이 스며들고 사물이 조금씩 생기 있는 천연색으로 바뀌었다. 목소리는 가벼워지고 매사에 더 너그러워졌다. 가족과 치대면서 사는 게 좋아지고 뒷마당의 싱그러운 녹음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한 퇴근길, 일렁이는 노을의 물결에 감사했다. 

  

하지만, 힘든 날은 또 찾아왔다. 마치 마음에도 동틀 녘, 한낮, 해 질 녘이 있고 한 달에 사나흘은 깜깜한 밤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것이 주기적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거운 몸과 마음을 한탄하며 잠들었다 깨어난 어느 아침에 나는 드디어 범인을 잡았다. 잠을 잔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는데 기분이 저절로 가벼워져 있었다. 머릿속을 휙 지나는 게 있어 달력을 보며 찬찬히 헤아려 보았다. 월경 전 증후군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호르몬, 이것이 범인이었다. 


5년 동안 먹어왔던 약 복용을 갑자기 중단한 것 때문에 더 심한 증상을 겪은 것 같았다. 내 낙심과 우울에는 확고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달라진 호르몬 분비량 때문이라는 게 어이없었다. 도대체 호르몬은 무엇이고 얼마나 내 몸에 흐르는지 알아보았다. 호르몬은 우리 몸의 특정한 기관에서 분비되어 다른 세포에 신호를 전달하는 화학물질이다. 보통 혈액이나 조직에 극미량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극미량이라니 그게 얼마큼인가. 여성의 에스트로겐은 배란 주기에 따라 변동이 있지만 혈액 내 농도로 대략 40~400pg/mL이고 남성의 테스토스테론은 3~10ng/mL이다. 1나노그램 (ng)은 1그램의 10억 분의 1이고, 1피코그램은 (pg)은 1그램의 1조 분의 1이다. 한 줌의 솔솔바람이 마음에 태풍을 일으킨 것이다.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 극미량에 감정이 요동친 게 허무해서 내 무력함을 한탄했다. 그것이 기도 제목이었던 적도 있었다. 인생을 더 극적으로 몰고 가는 범인의 정체를 알았다고 해도 그 가진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치 선박의 작은 방향키가 목적지를 바꿔버리는 것처럼 호르몬은 적은 양이라도 엄청난 위력을 가질 수 있었다. 성호르몬에 이끌린 사람들이 무모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고, 세로토닌과 도파민 등의 부족으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종종 중대한 위기에 처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불행의 원인으로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만 탓할 수는 없겠지만, 원인 중 하나를 알았으니 이겨낼 방법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얼마 전 달라스한인문학회 모임에서 책 한 권을 얻었다. 『뇌 신경과학으로 본 마음과 문학의 세계』로 내과 전문의이자 소설가인 연규호 선생님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제럴드 에델만(Gerald M. Edelman) 교수의 저서를 기반으로 펴낸 책이었다. 호르몬을 이길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생명 뇌’인 대뇌하부의 뇌는 태아 생명 유지를 위해 임신 초기부터 발달한다. 그 위층으로 감정과 기억 처리에 관여하는 ‘감정 뇌’ 변연계가 자리 잡고 임신 중기부터 활발히 발달한다. 변연계의 시상하부는 다양한 호르몬 분비를 조절한다. 마지막으로 이성을 담당하는 ‘이성 뇌’ 대뇌피질이 형성되는데, 전두엽의 앞부분인 전전두엽은 출산 후 3세까지 성장한다. 이성의 뇌가 천천히 발달하는 점을 생각하면 왜 아기들이 본능에 더 충실한지 알 수 있다. 이성의 뇌는 25세 무렵에 완성되며 감정의 뇌와 평생 시소 싸움을 벌인다.


종일 보드라운 초콜릿 크림에 싸인 폭신한 케이크를 갈망하는 변연계의 욕구를 “그게 혈당 스파이크를 일으키면 네 혈관이 병들 거야.”라며 전두엽이 말린다. 옳은 판단이지만, 늘 이성이 이기는 것은 아니라서 기어이 케이크를 사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올 때도 있다. 감정에 호르몬까지 가세하면 연막을 피운 것처럼 이성이 길을 잃기도 한다. 때로는 감정이 쓰나미처럼 이성을 쓸고 지나가 그 대가를 치를 때도 있다. 


감정과 이성이 갈등하며 학습한 결과물은 기억으로 저장되고 그 기억이 정서를 이룬다고 한다. 분노가 걸러져 한으로 남고 기쁨이 다듬어져 명랑함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처절한 전투의 결과로 남아있는 정서에 주목했다. 내 머릿속 정서, 평화의 집에는 지혜로운 여인이 하나 앉아 있으면 좋겠다. 그는 감정이 원하는 걸 적당히 눈 감아 주기도 하지만, 보통은 이성이 감정을 조금 더 이기도록 조절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이 들수록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점점 더 힘겨워서다. 


이제는 갱년기로 접어들어, 또 한 번 호르몬이 요동친다. 이번엔 쉽게 속지 않고 내 몸에 먼저 주의를 기울인다. 잘 자고 잘 먹고 멋진 곳을 찾아 하이킹하러 다닌다. 두뇌가 일을 잘하도록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배운다. 


푸른 하늘이 더 높아진 이번 가을엔 어쩌면 호르몬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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