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그리움을 삭이는 방식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184회 작성일 24-03-15 17:47

본문

Apple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파친코’ 시즌1에서 주인공 선자는 어머니와 함께 자기 하숙집에 손님으로 왔던 전도사 이삭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랑해서 한수의 아이를 임신해 미혼모가 될 처지에 놓인 선자의 사연을 우연히 듣게 된 이삭은 그녀에게 청혼하고, 목사님의 기도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선자는 이삭과 함께 어머니와 정든 고향을 떠나 일본 이쿠노쿠에 있는 형 요셉의 집에서 살게 된다. 

어느 날, 몸이 무거운 선자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형님이 선자의 빨래를 해 널고 있었다. 고향의 냄새가 담긴 옷으로 그리움을 달래던 선자는 옷을 빨아서 냄새가 다 없어졌다며 서럽게 운다.

선자가 형님에게 이렇게 아린 게 언제쯤 끝나게 되냐고 묻자, 참는 법을 배우게 될 거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움은 사라지거나 끝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꾹꾹 눌러 참는 법을 익혀가는 거였다. 노력해도 통제되지 않는 게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이국에서 그리움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두 여인의 삶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선자의 아림이 내 아픔으로 다가왔다. 

딸 친구 중에 고향이 인디아인 아이가 있다. 그 친구가 보낸 사진을 보고 뭉클했던 적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을 실제로 보아서인지 잊히지 않는다.

사진 속엔 자주색 블라우스가 벽에 걸려있었다. 옷에 초점이 맞춰진 사진이라 방안에 놓인 살림이 선명하게 부각되진 않았으나, 부유해 보이진 않았다. 그 친구의 엄마는 돌아가셨다. 아빠는 엄마가 즐겨 입던 블라우스를 일 년째 벽에 걸어 놓고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런데 홍수가 났다. 천장에서 비가 새는 바람에 옷이 젖어서 어쩔 수 없이 빨게 되었는데, 엄마 냄새가 사라져서 아빠가 슬퍼한다는 사연을 사진과 함께 전해왔던 것이다.

죽은 아내의 옷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살아있는 아내를 두고도 바람을 피우거나,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 남편이 있다는 혼탁한 세상에 살다 보니 아내 냄새가 사라진 옷을 끌어안고 우는 남편이 인간문화재처럼 느껴진 건 지도 모르겠다. 

친정어머니가 48살의 짧은 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라는 표현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체험했었다.

부지런했던 어머니는 빨랫줄에 널어 둔 빨래를 밤이슬이 내리도록 걷지 못했고, 늦둥이 아들이 걱정되어 눈을 뜬 채 숨을 거뒀다. 동네 어른들이 엄마가 쓰던 옷가지와 물건을 태우라고 하셨다. 그래야 훌훌 편히 갈 수 있다고.

장의사 소각장에서 태워 준다고 하여 챙겨다 주긴 했지만, 다 주진 못했다. 나 역시 엄마의 옷을 빨지 않은 채 오랫동안 끌어안고 살았다. 엄마 냄새는 그리움을 달래고 삭이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누구나 가슴 속에 그리움이란 우물을 묻고 산다. 때로는 퍼 담고, 때로는 퍼 올리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리움의 수위를 조절하며 사는 거다.

부재나 상실에서 오는 그리움은 인력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애써 누르고 또 누르며 삭여야 한다. 그래서 때론 망각이라는 기능이 감사하다. 상실의 아픔을 매순간 기억한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사진을 보고, 누군가는 추억하고, 누군가는 유품을 어루만지고, 누군가는 옷에 남은 체취를 맡으며 숨통을 연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지인은 마음이 힘들거나 그리울 때면 아침 일찍 남편 산소에 들러 푸념을 늘어놓곤 한다. 나 혼자 놔두고 거기 편히 누워 있으니 좋냐고 통박을 주고, 속풀이도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와 하루를 시작한다. 

 

심성보 시인은 그의 시 「그리움이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리움이란

누군가에겐 행복의 사랑으로 다가오는 기쁨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떠난 사람 뒤에 오는

슬픔의 얼굴을 가진

차가운 비수 같은 것일 테지”라고. 

 

내 그리움은 어느 쪽일까? 이 세상 어딘 가에 내가 그리워서 그리움을 삭이는 이가 있을까? 근간 여러 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마다 삶과 죽음, 인연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눈을 뜨면 떠오르는 그리운 사람들, 차마 떼어내지 못해 끌어안고 산다.

그리움이란, 고통이기도 하지만, 산 자가 누리는 축복이기도 하다. 어쩌면 삭이지 않아도 좋을 그리움이 나를 살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리움이라면 끌어안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워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상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닭고기’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닭고기는 담백한 맛과 부드러운 육질이 특징입니다. 다른 육류와 달리 근육속에 지방이 섞여있지 않아 맛이 담백하고 소화흡수가 잘되므로 위가 약한 사람들에게 …
    문화 2024-03-15 
    대부분의 중년들에게 은퇴는 두려움이다. 가능한 오랫동안 은퇴하지 않고 일하기를 원한다. 일이 인생의 활력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돈이 원인이다. 일하지 않고 먹고 살 경제적 여력이 없어서다. 나이가 들어서도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신체적으로 힘든데…
    부동산 2024-03-15 
    2025 회계연도 H-1B 비자 추첨 등록이 3월 6일에 시작되었다. 미국 정부는 매년 85,000개의 새로운 H-1B 비자를 부여하는데, 이 중 65,000개가 학사학위 이상 소지자에게 부여되고,  20,000개가 미국 대학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에게 부여된다. 외국인…
    법률 2024-03-15 
    Apple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파친코’ 시즌1에서 주인공 선자는 어머니와 함께 자기 하숙집에 손님으로 왔던 전도사 이삭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랑해서 한수의 아이를 임신해 미혼모가 될 처지에 놓인 선자의 사연을 우연히 듣게 된 이삭은 그녀에…
    문화 2024-03-15 
    파월 연준의장은 금리 인하를 시작하는데 필요한 경제적 상황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지난주 상원 은행위원회의 질문에 “인플레이션이 2% 수준에서 지속 가능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이 더욱 커지길 기다리고 있다”며, “그 확신은 멀지 않으며, 우리가 확신을 갖…
    세무회계 2024-03-15 
     에밀리 홍결과가 말해주는 명문대 입시 전문 버클리 아카데미 원장www.Berkeley2Academy.com 문의 : b2agateway@gmail.com  대학들의 레귤러 어드미션 결과 발표일들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이미 레귤러 어드미션 결과를 통보하고 있는 대학들…
    교육상담 2024-03-15 
    샌프란시스코의 아침, 오늘은 분주했던 여행을 마무리하고 달라스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추억들을 정리하며 너무나 분주했던 이곳의 여행 속에 여유로운 마음이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같이 인지하고 있는 차분한 샌프란시스코인들의 여유를 …
    문화 2024-03-08 
    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에게도 익숙하지만 이제는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진 음식인 ‘스시’에 관련된 내용으로 내용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일본의 음식은 몇가지가 있을까요? 스시, 우동, 덮밥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단연 ‘스시’가 일본을…
    문화 2024-03-08 
    보험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알수 없기에 불확실한 미래를 경제적인 차원에서 준비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험에 가입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보험의 종류는 생명보험, 자동차보험, 집보험, 건강보험, 사업체보험등이 있고 그밖에도 메인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
    보험 2024-03-08 
    새로 입양한 강아지 이름을 정하려고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꼬리치는 강아지를 보니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아 너는 이제부터 초롱이다. 초롱아! 부르니 꼬리치며 다가온다. 그 뒤 초롱이 친구로 입양한 강아지는 조그만 녀석이 오자마자 큰 초롱이와 밥그릇 싸움하더니 커다…
    문화 2024-03-08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느끼는 것이 많다. 그중 하나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세법도 바뀐다는 사실이다.멀리 갈 것도 없이 44대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Obama Care로 알려진 전 국민 대상 건강보험의 도입으로 기존 세법의 근간을 흔들더니 뒤이어…
    세무회계 2024-03-08 
    포도송이처럼 익어가는 인연에 강한 향기를 만들어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만들고, 붉은빛 유리잔에 인생 그릇을 담고 달콤하고 향기로운 이야기를 펼쳐봅니다. 와인 잔의 받침을 붙잡고 밝은 쪽을 향해 잔을 조금 기울여 와인 잔을 살짝 흔들며 와인의 색깔이 붉고 반짝반짝 …
    문화 2024-03-01 
    안녕하세요! 오늘 주제는 ‘아티초크’라는 조금은 생소한 이름의 채소입니다.‘아티초크’라는 이름은 생소할 수 있으나 실제 진열된 상품을 보시게 되면 어느 정도 눈에 익숙한 느낌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꽃봉오리 채소인 ‘아티초크’의 겉잎은 알로에 껍질처럼 두꺼우며 마치…
    문화 2024-03-01 
    불과 70여 년 전만 해도 세상에 없던 제품이 오늘날 세계 80억 인구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 가전기기부터 디지털 기술, 인공지능, 국가 안보, 산업과 경제 전반을 좌우하는 핵심이 되었다.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칩, 반도체다. 석유를 빼놓고 20세기를 이해할 수 없…
    부동산 2024-03-01 
    2024년을 시작한것이 얼마 되지 않은것 같은데 벌써 두달이 훌쩍 지나고 있다. 본격적인 세무보고 시즌이고 오는 3월15일 법인세무보고 그리고 4월 15일 개인세무보고 마감이 지척으로 다가온 때이다. 작금의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과연 언제 금리를 내리는 …
    세무회계 2024-03-01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