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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수상, 한국인으로서 뿌듯…정상성 부수는 감독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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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회 칸국제영화제에 한국 장편이 한 편도 초청받지 못하면서 충무로에 실망과 위기감이 감돌던 지난달 말, 뜻밖의 낭보가 칸에서 날아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 허가영(29) 감독이 중단편 영화 '첫여름'으로 라 시네프(시네파운데이션) 1등 상을 거머쥐었다는 소식이다.
라 시네프는 전 세계 학생 영화를 상영하는 칸영화제의 경쟁 부문이다. 2001년부터 거의 매년 한국 작품이 초대장을 받았으나 1등 상을 받은 것은 허 감독이 처음이다. 645개 영화 학교에서 2천678명이 출품한 작품을 제치고 심사위원단의 최종 선택을 받았다.
라 시네프 수상자 자격으로 파리의 유서 깊은 극장 팡테온 시네마에서 '첫여름'을 상영하고 최근 귀국한 허 감독을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에서 만났다.
"한국 장편이 이번에 초청받지 못해서 저 역시 속상했습니다. 아직 학생이지만, 제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심란하고 불안하기도 했죠. 하지만 칸에서 만난 사람 중에 '영화가 죽었다'고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모두가 한국 영화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허 감독은 한국 영화계가 어려운 상황에서 "저의 작은 영화로 기쁜 소식을 안고 돌아갈 수 있어서 한국 영화인으로서 너무 뿌듯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허 감독의 KAFA 졸업 작품인 '첫여름'은 콜라텍에서 춤추다 만난 연하의 남자친구 학수(정인기 분)가 죽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영순(허진)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영순이 외손녀의 결혼식과 학수의 49재 중 한 곳에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칸영화제 측은 '첫여름'을 초청하며 "인간성과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허 감독은 그 한 문장에 감격해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허 감독은 시상식 때 심사위원장인 마렌 아데 감독이 "당신의 다음 작품이 너무 궁금하고 기대된다"고 말해준 것 역시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좋은 작품들 사이에 제 작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시상식에서도 즐기자는 마음으로 있었죠. 그런데 제 이름이 호명된 거예요.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아데 감독님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아, 내가 소감을 말해야 하는구나' 깨달았습니다, 하하."
무대에 선 그는 관객과 심사위원단 앞에서 "인간과 소수자, 삶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하는 감독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첫여름'에도 이런 그의 영화관이 듬뿍 배어 있다.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전형적인 할머니 모습과는 달리 자기 욕망에 솔직한 노년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그동안 '노인'을 얼마나 뭉뚱그려 이미지화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주인공 영순은 허 감독이 외할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든 캐릭터다. 몇 해 전 작고한 그의 외할머니 역시 "'할머니' 하면 떠오르는 포근하고 따뜻한 인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허 감독은 10대 때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때엔 "할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노인을 인터뷰하는 과제를 하기 위해 외할머니와 오랫동안 대화하며 이런 생각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할머니가 꺼낸 첫마디가 '내가 남자친구가 있는데 지금 연락이 안 된다. 걱정으로 잠이 안 와 수면제를 먹고 잔다'였어요. 그때 처음으로 그가 저의 외할머니도 아니고 엄마의 엄마도 아닌 한 명의 여자로 보였어요. 노인에 관한 저의 인식이 완전히 뒤집힌 순간이죠. 그날 집으로 돌아오며 느꼈던 얼얼한 감각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그는 "성과 사랑은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이 영화로 말하고 싶었다"며 "노년 여성의 욕망을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담아내 이들에게 위안도 주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첫여름'은 허 감독의 외할머니에게서 출발한 작품이지만, 캐릭터의 기본적인 설정 외에 대부분의 이야기는 허 감독이 만들어낸 픽션이다. 부산의 콜라텍을 찾아다니고 노인들을 만나며 시나리오의 디테일을 살렸다.
허 감독은 콜라텍에 처음 갔을 때 "나이가 너무 어려 이른바 '입뺀'(유흥주점에서 손님의 출입을 거부하는 것)을 당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그러다 노인 관련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는 그의 말에 콜라텍 손님들은 하나둘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보조출연자로 영화에 출연하고 의상을 빌려주며 허 감독을 도왔다.
'대선배'인 배우들도 허 감독을 학생이 아닌 감독으로 대하며 존중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영순 역의 허진과는 마치 "연애를 하는 것처럼 싸우기도 하고 사랑하며 작업을 이어 나갔다"고 했다.
"배우분들이 저를 어린 감독이라고 가볍게 대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아니라고 하면 절대 (같은 방식의) 연기를 하지 않으셨고 항상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셨죠. 제가 좋은 리더여서가 아니라 저희 할머니가 준 이야기의 힘, 시나리오의 힘 덕에 뛰어난 배우분들이 모였다고 생각해요."
'첫여름'은 허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다. 원래 경영학도였던 그는 막연하게 그려온 영화감독의 꿈을 찾아 지난해 2월 KAFA에 입학했다. 영화를 정식으로 공부한 지 1년 반도 채 안 된 시점에서 칸영화제 1등 상을 받은 셈이다.
허 감독은 하루빨리 첫 장편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상금으로 받은 1만5천유로(약 2천300만원)도 제작비로 쓸 계획이다. 라 시네프 1등 상 수상자가 첫 장편 영화를 만들면 칸영화제 상영 기회가 주어진다.
그는 "한때는 제 이야기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을까,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게 아닐까 무력감에 빠졌다"며 "하지만 칸영화제에서의 경험과 수상 덕에 '조금 더 해봐도 되겠구나'하는 희망과 안도감을 얻었다"고 돌아봤다.
이어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며 "우리가 편하게만 생각했던 정상성에 젖은 시선을 부수는 감독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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