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백련사 가는 길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1,132회 작성일 23-08-04 10:25

본문

친구가 전화를 끊지 않았다. 

절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차갑게 대하는데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많이 의지했던 친구였다며 가슴 아파했다.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짐작이 안 됐다.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 말고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오랜 시간 정을 나누었던 사람과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게 된 경험이 내게도 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서지만, 심성 고운 내 친구가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을 보니 우정을 오래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친구를 생각하니 지난봄 다산초당에 다녀온 기억이 났다. 전남 강진 만덕산에 자리 잡은 그곳은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의 유배지이다. 

산기슭 단아한 바위 사이에 지은 작은 초가집에서 18년 유배 생활 중 후기 10년을 지내며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다산이 차를 끓이던 바위와 그가 만든 연못을 보니 부지런한 천재 실학자의 자취가 그곳에 머무는 듯했다. 

초당 뒤편, 백련사 가는 길 입구의 안내 표지는 다산과 백련사 주지 혜장 선사(1772~1811)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혜장이 다산에게 배우기를 청했을 때 다산도 혜장의 뛰어난 학식에 놀랐다. 

이후 스승과 제자이자 둘도 없는 벗이 되어 학문을 토론하고 함께 차를 즐겼다. 

친구가 될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땅끝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얼마나 반가운 말동무가 되었을까. 비 내리는 밤에 혜장이 기약도 없이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는 이야기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비 내리는 밤에 솔방울을 태워 함께 나눌 찻물을 끓이고, 초가지붕 처마의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친구를 기다리던 다산의 모습이 그려졌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산길을 걸어보았다. 밤사이 내린 비로 동백꽃이 떨어진 4월 초 만덕산은 꿈틀거리며 소생하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편백나무, 삼나무는 줄기를 뽑아 올려 봄기운을 마시고 있었고, 야생 차나무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어우러져 연녹색 잎사귀가 구름같이 퍼져 나갔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그토록 아름다운 산길이라니. 두 사람이 참 부러웠다. 완만히 오르내리는 길을 30분쯤 걸으니, 산등성이 너머로 백련사가 보였다. 

다산은 산을 내려가 친구를 만난 기쁨을 시로 남겨 두었다. 짚신을 신고 어렵게 산길을 헤치며 갔지만, 혜장을 찾아가는 것에 “희망이 넘쳐 마음이 상쾌하였다.”라고 했다. “… 흰 베옷 적삼을 나부끼면서 내려와 반갑게 맞이하였네. 

손들어 애썼다고 사례하고는 풀밭 앉아 정담을 나누었다네… 다행히 촌 농막에 손님이 없어 내달리는 시내처럼 얘길 나눴지. 나는 《시경》,《서경》,《역경》을 말하고 그대는 《화엄》,《능엄》,《원각경》 얘기. 보슬비 허공에서 떨어지는데 주고받은 말은 모두 그윽도 해라. 사방에선 쥐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천분에 감동하여 눈물 흘렸네.” 

나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얼마나 소중한가. 서로 깊이 신뢰하며 존중했던 두 사람의 우정이 200년 세월을 거슬러 내 마음에 와닿았다. 

백련사 동백나무 숲속에 속절없이 떨어진 탐스러운 동백꽃은 땅에서 다시 피어난 듯 붉은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도 동백꽃 빛깔처럼 오랫동안 선연히 남아있다. 

키보드를 몇 번 치면 온갖 정보를 알 수 있고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사람과도 얼굴을 보며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어쩐지 우리는 200년 전 그들보다 더 외로운 것 같다. 

볼거리가 넘쳐나 친구 그리울 새가 없고 사람 만나는 시간보다 디바이스 화면 속 세상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아진 우리는 정말 전보다 더 잘살게 된 것일까. 생각해 보니 우정이란 단어를 들어본 지도 오래되었다. 

다산은 《남하창수집(南荷唱酬集)》에서 “오직 덕행으로 사귄 벗만이 처음에는 서로 마음에 감동하여 사모하고, 오래되면 화합하여 감화되며, 마침내 금석처럼 친밀해져 떨어질 수 없게 된다.”라고 했다.

어쩌면 애초에 우정이란 오직 덕스러운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차원 높은 기쁨인지도 모르겠다. 

덕스럽지 못한 내가 우정을 누리고 싶다면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내 친구도 나를 오래 참아줘야 할 것 같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서도 안 되겠다. 이 친구를 만나면 의욕이 나서 좋고, 저 친구에게는 유머를 배우며 또 다른 친구에게는 조언을 들을 수 있다. 

나도 친구에게 무언가 나눠줄 수 있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친구를 잃게 되어도 서로 맞지 않는 이였다면 인연이 다했다고 여기며 잘 멀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시절이 다하여 떨어진 낙엽처럼 말이다.

내일은 속이 타는 내 친구를 찾아가리라. 차 대신 얼음을 띄운 커피를 마시며 정담을 나눠야겠다. 우리도 내달리는 시내처럼 얘기를 나눌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백련사 가는 길, 친구에게 가는 길은 지금의 나에겐 먼 길이지만, 덕 있는 사람이 되어갈 날들은 다행히 아직 남아있는 것 같다. 

 

백경혜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에밀리 홍결과가 말해주는 명문대 입시 전문 버클리 아카데미 원장www.Berkeley2Academy.com 문의 : [email protected]  요즘 AI 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이미 들어와서 사람이 하는 일을 대체하고 있는 인공지…
    교육상담 2024-02-16 
    팬데믹을 겪으면서 전 세계는 암흑기를 맞았다. 투자는 물론 취업이며 사업까지 녹록치 않은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금리 때문에 무릎 꿇은 수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의 경색과 부동산 침체 앞에 자책하고 좌절했다. 하지만 이제는 ‘필승 전략’을 펼쳐야 할 때다. 언제…
    부동산 2024-02-16 
    금문교를 살짝 비켜 알카트레즈 섬(Alcatraz Island)이 보일 듯 말듯 살포시 내려 있는 샌프란시스코 겨울의 차가운 아침 안개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이를 먹고 자라는  샌프란시스코 자연의 풍성함을 느끼게 합니다. 도시의 …
    문화 2024-02-09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즐거운 한주 보내셨는지요. 오늘은 요리에 들어가면 마법의 맛을 낸다는 MSG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MSG는 Monosodium glutamate의 약어로서 1907년 일본 도쿄대 키쿠나에 이케다 물리화학과 교수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
    문화 2024-02-09 
    집보험에 가입하면서 또는 가입후에 라도 집보험의 보상혜택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동차보험은 장기적으로 볼 때 사고와 클레임을 한번쯤은 경험하게 되므로 보험 혜택의 내용을 그래도 좀 아는 편이지만 집보험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러다 보니 집 보험 가입…
    보험 2024-02-09 
    세금보고가 지난 1월 29일부터 순조롭게 시작됐다. 그동안 IRS가 공언했던 데로 첫날부터 큰 무리 없이 IRS 시스템이 잘 작동되고 있다.세금 환불도 이미 받으신 분들이 있을 정도로 예년에 비해 빨리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전국에 있는 250군데의 IRS의 Taxp…
    세무회계 2024-02-09 
    지인이 페이스북에 캡처한 사진과 함께 스미싱을 조심하라는 게시물을 올렸다. 아는 이의 핸드폰 번호로 문자가 왔는데, 짧게 요약하자면 자기가 재혼을 하게 되었으니 와서 축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진짜인 줄 알고 하마터면 첨부한 주소 링크를 누를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화 2024-02-09 
    지난 밤 하늘에서 내려보았던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야경을 뒤로한 채로 어느 도시보다 일찍 찾아온 라스베가스의 아침은 사막 한 가운에 피어 오르는 거대한 태양의 그림자를 길게 품은 채로 거칠 것 없는 대지의 위대함을 뽐내고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태양의 빛을 대지가 …
    문화 2024-02-02 
    안녕하세요! 오늘 소개드릴 식품은 ‘굴’ 입니다. 정확하게 말씀 드리자면 ‘냉동굴’(이하 ‘굴’)입니다. 아시안 마트 등에는 항상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상품입니다. 냉동굴은 보기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사실 브랜드 이름만 다르지 거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수입해…
    문화 2024-02-02 
    미국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시작할 때다. 모든 것이 잘 다듬어진 미국 도시의 깨끗함과 정리된 풍경은 나를 압도했다. 그러나 늘 엽서나 그림에 나오는 도시의 모습을 보며 지내다 보니 모든 풍경이 항상 정리된 그림 같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좀 여유 있…
    문화 2024-02-02 
    한밤 중에 갑자기 종아리에 쥐가 나서 잠을 깬다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아주 가끔은 쥐가 날 수도 있지만 이런 증상을 오랜 기간 동안 자주 겪는 분들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쥐가 나고 근육이 경직되는 원인과 예방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건강의학 2024-02-02 
    1월29일 월요일부터 IRS는 2023년도분 개인세무보고서 접수를 시작하였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세무보고 시즌에 돌입하는 때이다. IRS는 오는 4월15일까지 약 1억4천6백만 개인세무보고서 접수를 예상하고 있다. 개인 세무보고의 가장 중요한 서류중 하나인 W-2 양식…
    세무회계 2024-02-02 
    ChatGPT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AI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번 AI가 불러온 신산업 혁명은 반짝하고 잊혀진 수많은 기술처럼 단기 트렌드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AI는 개인의 삶과 산업지형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며 우리는 적응해야만 한다.신산업 혁명은 기존 …
    부동산 2024-02-02 
    해발 7000피트에 위치한 인구 8000명 정도의 캘리포니아의 조그만 스키 도시인  맘모스 레이크스(Mammoth Lakes)의 아침은 매우 아름답고 특별합니다.그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세라 서둘러 숙소 밖으로 나갔더니 촘촘히 내린 새벽 이슬 사이로 간간히 찍힌 발자국은…
    문화 2024-01-27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오늘은 나라별 새해에 먹는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떡국입니다. 떡국에 들어가는 가래떡의 긴 모양은 길게 무병장수하라는 의미와 가래떡을 동전 모양으로 썰어서 물질적인 풍요를 기원하는 음식입니다.떡국을 먹어 야 한살…
    문화 2024-01-26 

검색